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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벽의 끝, 결혼 (15)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와 태국의 코피피 여행.'

by 한나Kim

그와 함께한 2주간의 강행군으로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버린 나는, 그간 '순한 척'하던 가식을 모두 벗어던지고 사나운 호랑이의 민낯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그를 보며, 사랑이 이렇게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건가 싶었다.


다행인 것은 나의 폭발 후, 그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은 자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 10시에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신데렐라 마냥 사라지나에게 그는 늘 "너는 뭔가 할머니 같아."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지 않았던 그가 어찌 나를 이해했겠는가. "너도 나중에 풀타임으로 일을 해보면 알 거야"라고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왔었다. 참고로 그는 지금 '정각 퇴근 요정'이다. 사람은 그 상황이 되어보지 않은 채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법이다.


...


나는 요하네스와 싱가포르가 아닌 자연이 있는 곳을 여행하고 싶었기에 1주일 휴가를 내고 말레이시아의 말라카(Malacca)와 태국의 코피피로 여행을 떠났다.


말라카는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그곳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통치를 받은 역사가 있기에 여러 볼거리와 문화의 다양성이 숨 쉬고 있다. 도시 자체가 이색적이라 그런지, 이곳 출신의 유명한 예술가가 많다고 한다. 또 고품질의 수공예품이나 그림 등의 예술 작품을 파는 곳이 많았다. 게다가 자신만의 디자인으로 만든 옷가게도 많았기에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냥 도시 자체를 걷는 것만으로 뭔가 생생하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이곳의 다양한 역사, 특색 있는 건축물, 이색적인 문화를 더 알고 싶어서 우리는 인력거 투어를 신청했다. 인력거꾼이 우리를 태우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들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그때 들은 말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게 있다.


"여러 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고 통치했는데, 그중에서 네덜란드 시절이 가장 태평성대였어."


네덜란드인들은 자기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해줬고, 그들과 똑같은 기회와 복지혜택을 제공했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아주 작은 나라이지만, 그들이 여전히 경제대국이자 국민소득이 5만 불이 넘는 강소국인 이유가 바로 이런 관용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미국에서 일을 할 때 하우스메이트 중 말루(Malou)라고 하는 네덜란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부모님과 오빠가 우리가 사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의 가족들을 보면서 네덜란드의 강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이 근검절약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것은 독일인이랑 비슷했으나, 그들에게는 독일인에게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세대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말루의 부모님이 어른이라고 잰척하는 꼰대 기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그 어떤 편견 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편안한 느낌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을 집에 초대해서 '된장찌개, 제육볶음, 쌈장 및 상추'로 한국음식을 대접했었는데, 첫 한국음식이라 뭔가 어색해할 법도 하건만, 그들 모두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맛있게 쌈을 싸 먹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또한 내가 멕시코에서 요하네스를 만나고 온 후, 말루랑 통화를 하고 싶어서 네덜란드로 전화를 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말루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한테 "I heard that you've met a sexy guy in Mexico! Woo~"라고. 뭔가 어른이라기보다는 그냥 친구라는 느낌이 드는 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말루의 가족에게서 편협함이나 편견을 전혀 찾을 수가 없는데,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문화의 강점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든 가족이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덧붙이자면, 네덜란드는 미국이나 영국 시리즈물을 TV에서 방영할 때 더빙을 하지 않고 영어 그대로를 노출한 채 네덜란드어 자막을 넣는다고 한다. 때문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힌다고. 이 얼마나 실용적인 방법인가.


반면 독일은 노조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성우들의 결사반대'로 TV에서 영어로 된 시리즈를 방영할 때, 지금까지 모두 독일어 더빙을 입힐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메.. 이것이야 말로 엄청난 차이점이 아닐까. 한편, 이런 미련한 우직함이 독일 제품의 신뢰로 이어진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이야기가 잠깐 산으로 갔는데,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덜란드는 과거에도 대단한 나라였고, 지금도 굉장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궁극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가진 대한민국이라 백 년이 걸릴지 천년이 걸릴지 모르겠으나, 아주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다양성이 존중되는 나라, 다르다고 손가락질받지 않는 나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


매력이 넘치던 말라카를 뒤로한 채, 우리는 태국의 코피피 섬으로 향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였을까. 나의 변덕스러움이 슬슬 꿈틀대기 시작하며 돌아이 기질이 그곳에서 화산처럼 폭발한다 ;;


솔직히 코피피가 어떤 곳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더웠다와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섬이었다는 거,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사람의 기억은 참으로 오묘하다. 훨씬 이전에 갔던 멕시코의 오하카와 싱가포르의 리틀 인디아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이리 선명한데, 며칠이나 머물렀던 그곳의 기억은 왜 이리 희미할까. 아마도 요하네스와 함께한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신선함 또는 설렘이 줄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같은 날, 같은 일을 겪었어도 느끼고 기억하는 바가 모두 다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추억은 참으로 주관적인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지나간 것에 후회하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인지 정확히 모르니까. 어쩌면 요하네스와 함께 했던 멕시코에서의 추억 또한 나의 호르몬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코피피에서는 기억나는 장면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나의 분노가 역대급으로 터져 몇 시간이나 난리를 쳤던 부끄러운 기억이랄까ㅠ


말라카를 거쳐 코피피까지 요하네스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친구라도, 가족이라도 늘 붙어 있으면 다툼이 있기 마련 아닌가. 사실 단점이라기보다 남자의 습성이었던 것인데, 내가 그걸 알 턱이 없으니.. ;;


바다랑 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수영을 하고, 야시장에서 이것저것 사 먹고, 돌아다니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온 날이었다. 빨리 자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대충 씻고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어머나! 방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게 아닌가. 요하네스가 피곤하다고 모든 불을 끈 채 먼저 잠든 것이다. 그때 분노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


지금이라면 별생각 없이 조용히 잘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사랑 is 배려'라는 공식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던 시점이었기에 그의 이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우선 화장실에서 늦게 나올 여자 친구를 위해 스탠드불 하나 켜놓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나의 분노 포인트였다ㅎㅎ 그리고 그 분노는 결국 "네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막장 결론까지 다다른다. 맙소사


급작스런 분노게이지 상승으로 곤히 잠들어 있던 그를 깨워 온갖 헛소리와 잡소리를 해댔다. 처음에는 끄덕끄덕 듣는 척이라도 하던 그도 시간이 길어지자 나중에는 더 이상은 들을 수가 없다며 귀에 귀마개를 끼고 다시 잠을 청했다.


What?!?


그의 행동에 나는 미친* 마냥 더 신나라 칼춤을 추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도 신경을 안 쓰면서 곤히 자는 그를 보자니 울화통이 터져 분노는 더 솟구치기 시작. 결국에는 나 혼자 난리 치다가 내 풀에 지쳐 잠이 들었다는 결론이다.


...


한 번씩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97프로 천사야. 그리고 3프로는 김치 같아. 아주 매운 김치. 그게 너의 매력이야."


그때는 콩깍지가 단단히 끼었더랬지ㅋ


결혼한 지 14주년이 된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 분노조절장애야. 정신 차려."



결혼은 현실이다. 상대방의 장점이 단점이 될 수 있고, 상대방의 매력이 고난이 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ㅎㅎ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그에게 내 모습을 가감 없이 모두 보여주었고, 그런 나를 선택한 것은 그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잘못은 1도 없음. 누굴 탓하리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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