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에게 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멈춤 없이 흘렀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입국일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오기 바로 전날까지 두근두근 괜찮을까 걱정이 많았던 나이지만 막상 공항에서 큰 짐을 가지고 온 그를 만나니 진심으로 반가웠다. 덧붙여서, 나를 보기 위해 싱가포르까지 와준 그에게, 나의 마음은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었더랬다.
위의 글만 읽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감사함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 '사랑뿐 아니라 감사한 마음.' 어찌 이보다 더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태솔로로 살아온 이에게는 이 오버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끝도 없는 감정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쌓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얼마나 무의미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ㅠ_ㅠ
이 글을 통해 사랑에 경험이 없는 남녀가 왜 쉽지 않은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못되서가 아닌, 단지 경험이 없기에 그런 것임을 알아주면 좋겠다.
...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은 나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여 9시부터 현지인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하고 6시에 퇴근을 하면, 그는 회사 앞에서 반짝반짝한 골든 레트리버와 같은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흐르는 모습으로 "오늘 뭐 할까??"라며 나를 맞이했다.
첫 2주는 괜찮았다. 체력이 있었기에 그가 가자는 곳에 다 갈 수 있었다. 고마웠으니까. 여기까지 와줬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나 3주 차부터 나의 체력이 바닥을 치기 시작하며, 아름다웠던 고마운 마음이 슬슬 멈출 수 없는 분노로 바뀌기 시작한다.
부글부글.. ¤_¤
'얘는 눈치가 없는 거야? 내가 집에서 노는 것도 아니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 갔다가 퇴근을 하자마자 지친 몸을 이끌고 니랑 하루 종일 놀고, 그리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또 놀고... 정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른 척하는 거야?!'
사실, 오늘 쉬고 싶다고 강하게 이야기했으면 될 일이었다. 근데 요하네스도 예사로운 인간은 아닌지라 열 번을 거절해도 열 번을 부탁하는 인간이었기에 ㅠ 연애 경험이 없던 나에게는 사실 굉장히 벅찬 상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가 Yes라고 할 때까지 집요하게, 그리고 느긋하게 1년이고 2년이고 반복적으로 요청을 한다. 나중에는 그의 똑같은 요청에 질려버려서 Yes를 하고 만다 ;;
어느 날은 수영장에, 어느 날은 영화관에, 어느 날은 쇼핑센터에, 어느 날은 센토사, 어느 날은 절에...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이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사랑의 경험이 없었던 나는 '사랑=희생'이라는 나만의 환상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결국 3주 차가 되자 너무 피곤하여 이가 흔들리는 지경까지 간 후, 화산에서 마그마가 폭발하듯, 나 또한 터져버렸다.
"나 이제 못해. 힘들어. 우리 일주일 간 만나지 말자. 나한테 전화도 하지 마. 우리 회사 앞에 오지도 말고, 내 집에 오지도 말고. 그냥 일주일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거야. 너무 피곤하고, 너는 너무 이기적인 거 같고, 네가 배려를 1도 안 하고, 어쩌고 저쩌고..."
어제까지 세상 천사 같던 그녀가 갑자기 저리 돌변을 해서 일주일간 만나지 말자며 폭발을 하는 상황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엉엉 울었다. 하긴 내가 봐도 사이코지. 조금씩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니고,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급 폭발을 하니, 옆에 있던 사람으로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 같긴 하다. 겁에 질려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간 그는 정말 3일간 전화도, 회사 앞에도 절대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없는 3일이 약간 허전하긴 했으나,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으로 충분하게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퇴근 후, 차분하게 노래도 듣고, 걷기도 하면서 '역시 혼자가 좋다!'라고 생각하며 힐링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퇴근 후 저녁거리를 사러 집 근처 마트에 갔는데, 웬일? 그곳에서 요하네스를 만난 것이다.
눈이 빨개진 채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며 "잘 지내고 있지?"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내가 뭐라고 저리 눈치를 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애처로움? 모성애? 사랑? 아무튼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감정이 나를 감쌌다.
"밥 먹었어? 우리 집에 가자. 저녁 해줄게"
결국 딱 3일간의 힐링 후에 그와 다시 만난 것이다. 그래도 대폭발 후에는 내가 가기 싫다 또는 하기 싫다고 3번 정도만 이야기하면 그가 누그러지긴 했으니,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조금씩 나는 그에게 익숙해져 갔다. 혼자 있는 시간보다 둘이 있는 시간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늘 좋은 것만이 아닌, 가끔은 불편하기도 하고, 또 내 방식을 고집하기보다는 함께 맞춰가는 것임을 조금씩 알게 되었달까.
그렇게 그는 나에게, 또 나는 그에게 길들여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