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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벽의 끝, 결혼 (13)

'손금으로 본 내 운명.'

by 한나Kim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피바람이 불던 두 달이 지난 후, 최종 70인 안에 든 나는 더 이상의 해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희한하게도 심신이 안정되니, 그때부터 다시 슬슬 요하네스가 싱가포르로 오는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그와 같은 방에서 지낼 생각이 단 1%도 없었기에, 이걸 독일인인 그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덧붙여 그의 싱가포르 재방문부터는 가벼운 인연이 아닌, 나름 진지한 관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출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에휴.. ㅠ



어느 날 나랑 친했던 중국계 말레이시안 동료인 '리친'이가 싱가포르 절에 같이 가자고 했다. 관광차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주말에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곳은 향으로 가득 찬 전형적인 중국 스타일의 절이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와 수다를 떤 후, 지하철을 향해 나오는 길이었다.


그때, 길가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유독 한 사람,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 나이 지긋하신 중국계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딱 봐도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리친이에게 물어봤다.


"저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손금 봐주는 사람~"

"오우! 나 한 번 보고 싶어. 통역 좀 해줘."


안 그래도 요하네스가 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잘됐다 싶어서, 그에게 나의 손금을 보여주며 운명을 물었다. 그는 내 손금을 보고 딱 3가지를 이야기했다.


1. 너 작년에 운명 같은 남자가 있었지? 근데 놓쳤네. 아쉽지만 지난 인연은 미련을 버려라.

->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한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키가 큰 것도, 그렇다고 잘생긴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 짧은 기간이었기에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아저씨가 말하는 인연이 아마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2. 2년 전에 잠깐 만났다가 요 근래에 다시 만나려고 하는 남자 있지? 만약 너네가 그때 사귀었으면 헤어질 운명이었다. 그때 안 사귀길 잘했네. 좋은 인연이야. 이 남자는 놓치지 마.

-> ㅇ_ㅇ 샤머니즘의 매력이 이런 거 아니겠습니꽈?! 뭔가 불안한 순간에 그 불안함을 잠재우는 그들의 힘! 어쨌든 이 사람도 좋은 인연이니 놓치지 말라는 소리에, 나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3. 너의 자궁에 문제가 있으니 한약방에 가서 '이것'을 먹어야 해. 이것만 먹으면 괜찮아지는데, 이거 안 먹으면 임신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 리친이에게 그 '뭔가'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미안한데 이 사람은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이라 이 분이 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그냥 매실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한약인데.. 진짜 모르겠다. 미안해"


아쉽지만 이 정도의 통역도 훌륭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렇지만 이 찜찜함은 뭘까. 임신이 어렵다고? 음.. 이 불쾌함을 해소하고자, 그 해 겨울, 박양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깐 한국에 들어온 김에 산부인과를 방문해 아주 자세하게 검진을 받았다. 그때 결과는 '이상 무!'.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아저씨가 한 말이 맞기라도 한 듯, 나는 둥이를 낳기 전에 4번이나 유산을 했다. 여자로서 참 힘든 시기였는데, 솔직히 나를 더 힘들 게 한 것은, 그때 손금 아저씨가 먹으라고 했던 매실로 만든 한약을 먹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였다.


과연 그 약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손금으로 이렇게 구체적인 것까지 진짜 알 수 있는 것일까? 지금도 그게 너무나 궁금하다.


* 4번의 유산 , 나는 자연으로 쌍둥이를 임신했다.(시아버님 형이 일란성쌍둥이) 그후, 무사히 출산을 후에는 임신은 나와 맞는 시기 또는 아이와의 인연으로 되는 것이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


시간이 빠르게 흘러 그다음 해 1월이 되자, 그는 곧 비행기 티켓을 산다고 했다. 자 말할 시간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더욱 큰 실망을 할 테니 서둘러야지.


"나는 너랑 내 방에서 지낼 생각이 없어. 우리 집 근처에 네가 두 달간 살 수 있는 방을 구할게."


그의 목소리는 실망으로 가득 찼지만, 싫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았는지 어정쩡하게 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다음 날, 내가 사는 곳 지하철 역 게시판에 '두 달간 방을 구합니다'라는 메모를 붙였다. 그 후 몇 명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한 곳을 구했다. 유치원생인 아들들과 싱가포르로 유학 온 한국인 엄마였다.


이제 모든 것이 세팅됐다. 회사도 안정이 됐고, 그의 집도 찾았고, 손금 보는 아저씨로부터 그가 인연이라는 말도 들었고 말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의 두려움도, 불안함도 남아있지 않았다.


...


시간은 흐른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고 우울한 나날들이라 할지라도, 결국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어느덧 괴롭던 순간도, 힘들었던 순간도 모두 지나가고, 평화로운 날들이 내 옆에 와있음을 문득 알아차리게 되는 것 같다.



버티다 보면 결국 힘든 날이 지나고, 좋은 날이 오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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