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 라오스 나홀로 여행'
싱가포르에서 다니던 직장에 미련 없이 사표를 낸 후,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가보지 않았던 베트남과 라오스 여행을 계획했다. 먼저 하노이로 들어가 구경을 하고, 하노이 근교인 사파•박하를 여행하는 틀을 짰다. 그 후, 버스를 타고 발길 닿는 라오스 도시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노이는 더웠다. 6월 정도에 갔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웠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나 좋아하는 쌀국수를 먹을 때도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노이에서 먹은 쌀국수는 최고였다. 그리고 현지 식당에서 먹었던 분짜의 맛도 생생하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감탄을 하면서 먹었던 음식.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어서 가끔 분짜를 먹으러 가지만, 그때의 충격적인 맛은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노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약간 심심해져서 '하롱베이 1박 2일 투어'를 신청했다. 하롱베이는 아시아 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모습의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다. 묵으로 그린 듯한 산수화가 내 눈앞에 있다는 느낌이랄까.
하롱베이 1박 2일 투어는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배를 타면서 바다 위에 흩뿌리듯 산발적으로 솟아있는 돌섬을 구경하고, 일몰도 보고, 배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는 선상 투어이다. 나름 만족스러운 투어였다.
하롱베이 투어 후에는 산악 소수민족 마을인 '사파•박하 2박 3일 트레킹 투어'를 신청했다.
새벽에 사파로 향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큰 버스에 타기에, 버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친해진 독일인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얼마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으로 베트남에 놀러 왔다고 했다.
남자는 은행원이고 한번 이혼을 하고 이번이 재혼이라고 했고, 여자는 유치원 교사이고 첫 결혼이라고 했다. 나 역시 이 부부에게 베트남이랑 라오스를 여행한 후, 멕시코에서 만난 독일인 남자 친구를 만나러 독일에 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버스에서 한참을 얘기했던 것 같다.
사파에 도착 후, 나는 그룹 투어를 신청했기에, 개별 투어를 신청한 독일 커플에게 좋은 여행을 하라고 인사를 하고 갈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들이랑 함께 투어를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신혼여행으로 온 커플인데 내가 끼면 좀 그렇지 않나?' 싶은 마음에 거절을 했으나, 둘 보다는 셋이 더 즐거울 것 같다고 계속 같이 가자고 하기에 그냥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커플과 나, 가이드 1명 이렇게 4명이서 투어를 하게 됐다.
이처럼,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인연은 참으로 신기하다. 순간적으로 서로에게 홀리듯 친해지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짧은 순간이지만, 뭐랄까.. 오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달까. 그러다가 결국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헤어짐이 확정된 관계이기에 이 짧은 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보내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여행의 묘미는 이처럼 강렬하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인연'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파•박하는 고산 마을을 여행하는 투어이다. 산속에 소복이 쌓여있는, 초록 초록하고 고즈넉한 마을을 보면서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정화됨이 느껴진다. 솔직히 하롱베이 투어보다 훨씬 좋았다. 혹시 하노이에 가는 분이 계시다면 2박 3일 사파•박하 트레킹을 꼭 추천하고 싶다.
이른 아침 뽀얗게 내린 물안개, 향긋한 풀냄새, 끊임없이 이어지는 초록 물결들, 이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아,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나의 존재'가 느껴진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여행을 하면서 2주일을 보낸 후 나는 결국 파산했다ㅠ 가지고 온 현금을 모두 쓴 것이다.
예전에 여행할 때는 늘 쓸 만큼의 현금을 가지고 다녔다. 현금이 얼마 남았는지를 가늠하면서 여행을 하면 미리 정한 예산을 초과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트남이 내 인생 최초로 예산 맞추기를 실패한 나라가 된 것이다.
준비한 현금은 다 써버렸고, 라오스를 여행할 시간은 얼마 안 남았기에 서둘러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으로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비엔티엔은 정신이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하노이처럼 사람들이 살아 꿈틀댄다'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뭔가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도시라는 느낌. 확실히 사회 개방을 뒤늦게 했던 나라의 분위기가 있었다.
비엔티엔의 호스텔에서는 귀여운 일본녀와 눈빛이 건강하지 못했던 일본남을 만났다. 셋 다 특별한 일정이 없었기에 이틀 정도 같이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일본남은 전형적인 프리타(알바만 하면서 사는 사람)로, 사회성이 거의 없는 느낌이었다. 호스텔에 우두커니 있는 그를 보니 짠한 마음이 들어서 같이 다니자고 제안을 했을 뿐이다.
일본녀는 대학교 2학년이라고 했고, 고등학생 때부터 아저씨들이 오는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작년에는 이집트를 다녀왔다고. 주위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각자 개성이 있던 셋은 비엔티엔 도시를 구경하고, 다음 날은 메콩강으로 갔다. 그곳에는 큰 튜브를 타고 하류까지 둥둥 떠내려 오는 투어가 있었는데, 그걸 하기로 결정했다!
메콩강에 나를 맡긴 채, 튜브 위에 앉아 둥둥 떠내려가는 아주 원시적인, 그리고 뭔가 49%가 부족한 어설픈 투어였다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린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굉장히 즐거웠다.
일본녀랑은 물길에 떠내려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일본남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혐한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말을 할 때 은근히 까내리던 그 분위기, 나를 바라보던 건강하지 않던 눈빛.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음 날도 그와 함께 다닌 것은, 나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니까. 안 그래도 외로운 사람일 텐데, 굳이 나까지 그를 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류까지 다 내려와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밥을 먹을까 하고 있었다. 그때 저어 멀리서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오는 힙한 60대 초반의 아저씨? 할배가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긴 회색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레이벤 선글라스에, 회색으로 깔맞춤 한 흡사 우리나라 개량한복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분이었다. 나는 "와, 엄청난 포스가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분명 일본 사람일 거야. 한국에 저런 힙한 할배는 존재하지 않거든!"라고 얘기했고, 일본녀도 일본인 같다고 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분이 이런 곳에서 한국인 처자를 본 게 반가웠는지 나를 오토바이에 태워준다고 타라고 하셨다ㅎㅎ
얼떨결에 일본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그 할배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비엔티엔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분은 나와 동갑인 그리고 대기업에 재직 중인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셨고, 아내랑 이혼하고 자유롭고 싶어서 라오스에 와서 간지 나게 사는 중이라고 하셨다.
비엔티엔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분이 맛있는 점심을 사주신다고 하며 강가에 위치한 예쁜 음식점에 갔는데, 그곳에서 음식을 시킨 후 어떤 분한테 전화를 하자, 나보다 2~3살 어려 보이던 작고 예쁜 라오스 여인이 나타나서 우리의 점심값을 내주었다.
아저씨가 사주는 게 아니었나요? ㅇ_ㅇ
맛있게 점심을 먹고, 그 여자분이랑 이야기를 조금 했는데, 영어를 거의 못하셔서 대화가 깊게 되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말씀하시길, 이 여인이 비엔티엔에서 가장 큰 사채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ㅎ
비엔티엔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 3명의 인연뿐이다. 메콩강도, 비엔티엔의 거리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나에게 여행이란 사람을 만나기 위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우연한 만남'이 늘 즐겁고 소중했기에, 결국 나를 다시 여행으로 이끄는 것은 위와 같은 따뜻한 '인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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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20대의 마지막을 이렇게 3주간의 배낭여행으로 장식했다. 스무 살 여름방학 때 태국 여행을 시작으로 매년 방학마다 나갔던 배낭여행. 나의 20대는 여행으로 시작해, 결국 여행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자, 방랑은 이제 할 만큼 했으니 30대가 되기 전에 어서 사랑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렇게 철벽을 치고 여행만 하면서 살 것인가!
이제는 그를 보러 독일에 들어간다. 과연 그가 나의 퓨처 허즈번드(future husband)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내 너를 관찰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