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혼자, 그렇지만 외롭지 않게 여행하기.'
배낭여행을 시작했던 2000년 7월부터, 여행을 하면서 거의 외로운 적이 없었다. 물론 혼자 있는 것을 무지 좋아하는 성향이기에 가능했겠지만, 이런 성향 외에도 어디를 가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잘 어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여행법'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고, 막상 해보면 진짜 별게 아닌 방법이다. 별거 아닌 '모두와 어울리는 여행법'을 간단하게 나누고 싶다.
첫째, 여행을 할 때 호텔 대신 게스트하우스나 유스호스텔에 머문다.
-> 게스트하우스나 유스호스텔은 부엌이나 휴게실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을 이용하는 여행가들은 예민하지 않고, 나의 것을 나눠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편견이 없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확률적으로 높다. 그래서인지 공용룸에서 뭔가 혼자 사부작거리고 있으면 거의 60~70프로의 확률로 누군가가 대화를 걸어온다. 뭐 대단한 질문은 아니다. "어디에서 왔니? 다음 여행지는 어디니? 이 나라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가 어디니?" 등의 질문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면 된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위축이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근데 이때 상기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지금 나에게 말을 거는 이 여행자는 사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의례적으로 말을 거는 것뿐이다. 또한 지금 이 사람은 앞으로 나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보자. 영어를 못해서 부끄러우면 어떻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면 어떤가, 그냥 딱 한마디라도 해보는 것이다. 하다 보면 한마디가 두 마디가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면서 어느덧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던 나의 경험을 나눠보자면, 그 시절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배낭 여행자의 50~60프로는 거의 20대 초중반이었다. 그때는 이들이 내 여행의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들과 대화를 시작하면 대부분의 질문은 "What is your dream?"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인가. 생전 첨 본 낯선 이방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자체가 나를 더욱더 여행의 숲으로 빠지게 했던 것 같다. 근데 20대 후반이 되자, 저 질문에 질려도 너무나 질려버린 나는, 20대 초중반 아이들은 웬만해서는 피해 다니게 되었다는... 이렇듯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둘째, 점심이나 저녁을 공용 부엌에서 해 먹으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그리고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아침점심저녁의 모든 인사를 "밥은 먹었어?"라고 묻고,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라고 인사하는, 먹기에 진심인 민족이 아니던가. 모든 인간관계의 좋고 싫음은 밥으로 시작되어 밥으로 끝나는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인 것이다. 거기다 한식이 얼마나 맛있고 건강한지 우리는 이를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자랑할 필요가 있다. 평생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한식! 때문에 나는 여행을 갈 때 제일 작은 고추장을 늘 가지고 갔다. 그리고 현지에서 장을 봐서 1일 1끼는 거의 만들어 먹었다. 그때 조금 넉넉히 만들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이거 내가 방금 만든 퓨전 한국음식인데 좀 많이 만들었거든, 먹어볼래?"
희한한 것은 이렇게 밥을 같이 먹은 사람이랑은 인종 및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내적 친밀감이 쌓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솔직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너의 내일 스케줄은 뭐니?'로 시작되어 '할거 없음 우리 같이 여행하자'로 연결된다. 밥의 힘은 이런 것이다.
호주를 배낭여행할 때, 어떤 북유럽 여성분을 만났는데 그분에게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니, "케언즈에서 어떤 한국인 남자가 된장찌개(Korean Miso soup)를 줬었는데,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뜬금없이 말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그 한국인과 음식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었으리. 이렇듯 음식은 여행에서도 나와 너의 영혼을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셋째,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아무 편견 없이 듣는다.
-> 여행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내 주위에서는 평생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을 풍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라오스에서 만났던 대학교 2학년 생이었던 일본女가, "나는 남자들한테 술을 따라주고 돈을 벌어서 세계를 여행해. 작년에는 그 돈으로 이집트를 갔었어. 내 주위에는 나의 이런 모습을 아무도 몰라."라고 말했다. 그녀의 비밀을 나한테 이야기할 수 있던 것은 서로가 철저하게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때 아무런 편견 없이 그냥 들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그녀는 어느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여행을 사랑하는 어린 소녀일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잠깐 일을 할 때, 기숙사 같은 유스호스텔에서 살았더랬다. 그곳에서 브라질女와 터키계 독일女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아주 친해져서 자주 만났다.
브라질女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할리우드에서 볼법한 연예인 같은 매력녀로, 독일 의사랑 결혼을 했던 유부녀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3개월만 영어 공부를 하러 왔었다. 허나 자신의 끼를 주체하지 못했던 그녀는, 가끔 잘생긴 어린 남자랑 원나잇을 하고 그와 올 누드로 사진을 찍어서 꼭 내 이메일로 보냈더랬다. -_-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나 모범생이었던 그가 의사이기도 하고, 세상 순진하고 착해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냥 브라질에서 탈출하고 싶었다고. 그렇지만 막상 독일에 가니 유색인종이 하나도 없고, 너무나 보수적인 시골이라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샌프란시스코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터키계 독일女는 독일에서 태어난 이민자였지만, 독일에서 차별받으며 살았기에 자신은 완벽한 터키인이라 생각해 터키남자랑 결혼을 했다고 한다. 결혼 후 터키에서 살았지만, 큰 문화차이로 결국 1년 만에 이혼을 하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잠깐 샌프란시스코에 왔던 중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로에게 투명하게 솔직했던 우리는, 그때 당시 서로를 위로하는, 영혼이 통하는 Soul mate였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터놓지 못할 법한 이야기를 나누며 샌프란시스코를 누볐던 그때의 순간이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파릇파릇하게 살아있다. 참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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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선을 절대 넘지 않는 고리타분한 나이지만, 어딜 가나 다양한 사람과 어울릴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런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나쁜 직업이나,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저 모두에게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짧은 관계로 끝나는 여행이기에 이런 아량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넷째, 모르면 물어본다. 다만 밝고 경쾌한 태도로.
-> 너무 당황스럽거나, 아무것도 모를 때 또는 공포에 휩싸이는 순간이 생길 때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부분의 인간은 안 좋은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
2019년 여름, 나 홀로 러시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결혼 후 둥이를 키우며 배낭여행을 안 한 지 7년 만이었다. 로버트와 둥이랑 같이 모스크바에서 1주일을 놀다가 그들은 독일로 들어가고, 나 혼자 '모스크바 - 카잔'을 10일 간 여행했었다.
카잔 도착 후, 근교의 스비야쥐스크 섬을 여행하고 싶어서 선착장에 갔는데, 러시아어 1도 읽을 줄 모르고요.. 러시아어로 Hi도 못하는 사람이라.. 대체 어디에서 무슨 표를 사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우왕좌왕하다가 6명 단체로 모여있는 아주머니 그룹에 "스비야쥐스크 섬에 가고 싶은데 어떤 표를 사야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중 영어를 하는 한분이, "너 러시아어 몰라? 읽을 줄도 모르고? 음.. 우리도 거기 가니까. 우리 쫓아다녀."라고 그룹에 끼워줘서 3시간 동안 함께 여행을 했었다. 그들은 폴란드의 초등학교 선생님들로, 매년 방학마다 6명이서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여행에서는 이렇게 묻다 보면 얻어걸리는 경우가 꽤 많다. 물론 묻지 않아도 어찌어찌 다 가게 되어있기는 하다. 글도 모르고 말을 하나도 못해도 이상하게 여행지에서는 다 찾게 된다. 그렇지만 그리 고생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르면 그냥 물어보자.
다섯째, 여행지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면 의심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 희한하게 나는 여행을 할 때마다 나한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일이 일상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뜬금없이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어도, 별 의심 없이, 그리고 편견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편이다.
2012년 6월, 나 홀로 스페인 & 포르투갈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스페인은 그저 그랬지만, 포르투갈에 도착한 순간 사랑에 빠졌더랬다. 서유럽 여행하실 분들, 포르투갈을 꼭 가세요. 서유럽의 백미는 바로 포르투갈입니다!! 먼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 마드리드를 거쳐 포르투갈의 포르투 여행 후 리스본에 갔더랬다. 포르투도 환상적으로 예뻤지만, 리스본은 '예쁨 + Hip + 자유로움' 등 모든 매력이 살아있는 도시였다.
리스본의 중심가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잡고, 늦은 밤 그 아래에 위치한 재즈바로 내려가 음악을 들으며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웬 노숙자 같은, 근데 뭔가 스케이트 보더 같은 느낌을 가진 남자가 불쑥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는 영국의 비보이 출신인데, 얼마 전 열린 세계 비보이대회에 참가한 한국팀이 너무 색다르게 표현을 해서 자기의 심장에 꽂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을 듣고 한국 비보이팀 공연을 찾아보니 사물놀이와 비보이를 겸해서 표현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아주 개성 있게 생긴 여인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루마니아에서 연극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3명이서 그날 새벽 2시까지 여러 재즈바를 돌아다니며 음악을 들었더랬다.
여행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나와 비슷하다. 때문에 누군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대화를 해보자. 이런 인연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내 인생을, 그리고 내 여행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니.
마지막으로, 어디서건 혼자 있는 나를 즐기자.
->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게 어색하지 않고, 혼자 라이브바에 가서 맥주를 마시는 게 부끄럽지 않은 게 홀로 여행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핵심 키라고 할 수 있겠다.
나 홀로 여행을 하다 보면 인생은 어차피 혼자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내 옆에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음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짧은 인연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어떤 아름다운 인연이라도 영원하지 않다. 결국 모두 내 곁을 떠났고, 또 앞으로도 떠날 것이다. 인연이 5시간이 될 것이냐, 50년이 될 것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혼자인 것이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이 힘들어지듯, 여행 또한 힘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음.. 여행을 혼자서 온전히 누리다가, 잠깐 짧은 인연이 들어오면 그저 투명하게 진실된 마음으로 함께 즐기고, 그러다 헤어질 때면 그가 행복하길 기원하며 보내주면 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여행을 한다면, 여행 자체가 이별의 연속이 아닌, 만남의 연속이 되기에 즐거울 수밖에 없다.
...
아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은 것 같다. 이 글은 거의 6일에 걸쳐 썼다. 짧게 써야지 싶다가도 일단 쓰기 시작하면 왜 이리 쓸 말이 많은지 ;; 이러면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참 피곤해질 거 같긴 한데.. 뭐 어쩔 수 없지, 이게 나인걸 -_-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