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대신 왕정 어때? 주장한 커티스 야빈
오세훈 대표의 <커피팟>에 <키티의 빅테크 읽기>를 3년간 연재했다. 연재 과정에서 빅테크 기업들이 '민주주의에 큰 해약을 끼칠 수 있다'는 증거를 수두룩 뺵뺵하게 발견했다. 마크 저커버그의 변신이나, 일론 머스크의 흑화와 같은, 이제는 전세계 사람이 다 아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2.
실리콘밸리가 신봉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특성 때문이다.. (어느 비즈니스든 마찬가지지만) 빅테크에서 최상의 비즈니스모델은 '독점'이다. 테크 산업 특성상 창업자의 ‘선각자성’에 특히 조명이 집중된다. 혁신 스타트업을 일구는 과정은 선구자 창업자가 무지몽매한 국가와 대중을 계몽하는 과정으로 종종 그려졌다. 실제 상당수 빅테크의 운영은 흡사 '군주의 통치 과정'과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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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피터 틸의 <제로 투 원>이었다. 실리콘밸리가 혁신의 총아로 추앙받던 시절, 이 책은 창업의 교과서처럼 읽혔다.
3.
피터 틸이 누군가. 2016년 트럼프가 성추문으로 고전하던 시절 가장 먼저 트럼프에게 기부해 '실리콘밸리에 트럼프 지지자가 있다니?'란 인상을 심은 이다. 팰런티어 공동 창업자, 페이팔 마피아. 틸은 스탠포드대 시절 <다양성 신화 Diversity Myth>라는 우파 교내 매거진을 발행했고, 페이팔을 설립해 '전체 금융 시스템을 뒤집으려'했고, (진보적인 사상을 퍼뜨리는) 대학 교육을 받느니 차라리 대학 진학을 포기한 10대 틴에이저들을 창업자로 육성하는 게 낫다는 취지의 '틸 펠로십'을 운영한 이다. 2016년 이후 실리콘밸리의 우향우를 주도한 틸이 남긴 민주주의에 대한 유명한 말이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서로 호환(compatible)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데이터 마이닝기업 팰런티어는 미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 들어 일론 머스크가 주도한 DOGE를 통해 "국민 전체 데이터"를 손에 넣고 현재 이민국과 협조하여 불법이민자 색출과 추방 과정을 돕고 있다.)
https://www.ft.com/content/a65c93af-abf9-427c-a2ee-a9f5b3d518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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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틸을 비롯해 실리콘밸리의 우경화, 더 나아가 급진화에 큰 영향을 준 블로거가 있다. 신반동주의자, 또는 암흑계몽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이다.
엔지니어로 작은 스타트업의 엑싯 후 블로거가 된 그는 틸 뿐만 아니라 틸의 정치적 투자 결과인 JD 밴스 부통령의 사상, 일론 머스크의 ‘기존 정부 무너뜨리기 작전’ DOGE의 철학적 배경과 일맥상통하는 인물이다. <키티의 빅테크 읽기>에도 몇 번 언급했지만, 그의 주장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사실 ‘설마 이렇게 되겠어?’라며 (또는 한국에서 따라 할까봐) 소개하지 않았었다. 그의 주장 몇 가지를 보자.
커티스 야빈이 한 말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적합하지 않다.
민주주의가 옳다고 믿게 교육받았을 뿐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미국은 왕정국가가 돼야 한다. 왕다운 외모를 가진 인물로는
트럼프와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가 있다.
모든 공무원을 은퇴시켜야 한다.
RAGE! (Retire All Government Employees)
그가 주장하는 경제 정책은 ‘중상주의(mercantilism)’다. 트럼프의 ‘미국 중심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야빈은 현재 트럼프의 집권 2기가 ‘내가 말했던 대로 됐네’라며 흐뭇해 하고 있을까? 천만에. 그는 DOGE 성과가 여전히 ‘자유주의’적이라 충분하지 않고, 트럼프 관세 정책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비웃는 축에 속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6월 7일자 뉴요커지 기사를 참조)
5.
야빈의 이런 신반동주의 사상은 블로그스피어를 벗어나 실리콘밸리로 스며들었고, 정치권으로 흘러들었다. 연방교육부 해체 등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던 공화당 집권플랜 ‘프로젝트 2025’(헤리티지 재단)에 대해 트럼프는 선거유세할 때 “난 프로젝트 2025 몰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2기 취임과 동시에 대통령령으로 쏟아냈던 각종 정책들은 프로젝트 2025에서 그대로 따온 내용이 상당수였다. 야빈의 RAGE 플랜은 머스크의 DOGE 플랜으로 실현되면서 수십만명의 공무원이 실직했다.
야빈의 사상 –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를 떠올리자. 가난한 나라에서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는 USAID 같은 조직의 필요성이 느껴지는가? USAID는 트럼프 2기 집권에서 가장 먼저 뿌리째 뽑힌 조직이다.
6.
야빈이 주장하는 반민주주의, 반평등주의 사상이 먼저 자리잡아 지금 미국 트럼프 정부의 모델처럼 된 곳이 있다.
헝가리다. 1998년부터 최장기 총리인 빅터 오르반. 이민자 탄압, 언론탄압. 선거구 조정. 사법부 장악. 친위쿠데타 시도했다가 무산.
이런 오르반의 집권플레이북은 미 공화당이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룰. 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 거의 매년 초대되고 있고, 유럽의 극우파 정치세력 규합의 중심축이다.
트럼프와 머스크가 드라마틱하게 갈라선 후 머스크는 “트럼프를 탄핵하고 밴스를 대통령에 앉혀야 하나?”란 트윗에 “Yes”라고 답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밴스가 트럼프보다 사상적으로 더 신반동주의에 가깝다는 점이다. 밴스는 틸의 정치 투자의 최대 아웃풋이다.
기억할 것. 독재는 자본의 결합 없인 불가능하다. 푸틴의 러시아는 올리가르히(신흥재벌집단)와 밀착하며 독재 체재를 구축했다.
https://waleedshahid.substack.com/p/the-ceo-coup-how-musk-is-making-yarvins
7.
야빈은 자신의 급진적 정치체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왕이 된 자'의 리더십에 많이 기대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선지자 트럼프'가 미국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제 정치학자들은 '귄위주의'를 넘어 트럼프 정부를 지칭해 '전제정치', 또는 '파시즘'이라고 말한다.
한때 "내가 이렇게 블로그에 써도 진보진영에서는 하도 허황되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당히 안전하다"고 말했던 야빈. 트럼프의 리더십조차 충분히 전복적이지 않아서 성에 차지 않는다는 야빈.
그의 뒤에는 국민 데이터(팰런티어)부터 우주기술-통신위성(스페이스X), AI(xAI) 기술을 장악한 테크 거물들이 있다. 트럼프 일가가 직접 밈 코인을 발행하고 중동 오일머니를 끌어들여 크립토 산업 확장에 환호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거물들이 있다.
미국 이야기일 뿐이라고?'빨간 약'을 먹고 '계몽'되었다는 식의 단어가 웬지 익숙한가? 지난 6개월간 무정부상태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시민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은 누구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