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중학생이 되는 현 초등 6학년 아들은 이제 집에 오면 방에 들어가서 두 시간쯤 나오질 않는다.
화장실 가거나 물 마시러 나올 때는 제외하고.
기분 좋을 때는 안고 뽀뽀도 해주고, 지금까지 아빠 무릎 위에 잘도 걸터앉지만, 자기 덩치와 몸무게를 생각해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엄마 무릎 위에 앉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을 정도의 지각은 갖춘 청소년으로 자라고 있다.
하지만 나이에 맞는 성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내 품 안에 쏙 들어오지 않는 아들의 성장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아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쏙 안긴, 아니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자면, 옆에 앉아서 내 목을 끌어당겨 안아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 칭할 만큼 대단한 일이냐 물으신다면 아들의 사춘기를 겪어본 후 이야기 나누자고 제안하고 싶다.)
나는 종종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떠올려 아이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첫째는 말이 느린 아이였다. 말만 느렸냐면 대근육과 소근육 발달도 다소 느렸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 걸렸다. 둘째가 태어나기 6개월 전쯤부터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가기 싫어서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적응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끌고 나가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곤 했다. 그때가 25개월쯤 됐을 때였다.
아이를 들여보내 놓고 나면 우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지 문에 귀를 대고 한참을 서 있다가, 창문이 보이는 곳에 또 한참을 서서 기웃거리다가(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서 아이를 데려갈 시간만 또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부모 상담이 있었다. 아이반 선생님과 마주 앉자마자 선생님은 “어머님,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많이 늦은 거 아시죠?”라고 하셨다.
덧붙여 “아이가 좀 수동적이에요.”라는 말로 우리 아이의 문제점만 간단명료하게 콕 집어 이야기해 주셨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아이가 느리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 나를 추궁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거냐고, 그동안 뭘 한 거냐고.
한편으로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엉덩이 붙이고 앉자마자 아이의 부족한 점부터 이야기했어야 했나. 보통은 아이에 대해 칭찬부터 하지 않나, 내 눈엔 너무나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부족한 점밖에 없는 아이인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울다가 화냈다가 하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이들이 대부분 하원한 시간에 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우리 아이가 부족한지를 떠나 상담이 너무나 기분이 나빴다고, 우리 아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선생님께 우리 아이를 계속 맡겨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원장 선생님은 선생님 역시 초보라 상담할 때 실수하신 것 같다시며, 초보 엄마를 달래주셨다.
그럼에도 속상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속상해하며 앉아 있다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 걸 알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동안 읽었던 육아서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아이에게 맞게 적용해 나갔다.
모든 의사 표현을 손가락질과 ‘아!’ 한마디로 하는 아이를 대신해 통역기가 되어주었다.
멀리서 마을버스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아아!! 아아”를 외치면
“그래, 지금 노란색 버스가 다가오네. 9번 버스네. 전에 우리가 탔던 버스야. 반갑지?”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와 전철역 밖에 서서 전철이 지나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곤 할 때도
아이는 여전히 “아아! 아아!”만 외쳤다. 그러면 나는
“와! 저 멀리서 전철이 달려오네. 지금 막 터널을 통과했어. 소리가 엄청나게 크다. 그치?”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아이가 조용히 있으면 나는 실시간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아이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우리 앞에도 자동차가 가고 있어. 보이지? 앞 차는 검은색이네. 그 앞에는 버스가 서 있네. 초록색이네. 타요에서 봤던 로기랑 같은 색이야. 오른쪽에는 우리가 전에 갔었던 마트가 있네. 우리 그때 저기 가서 장난감 샀었잖아. 니가 좋아하는 전철 장난감 산 곳이 저기야.”
평소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이어서 계속해서 말하는 것 자체가 내겐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완전한 문장으로 들려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단지 자기 입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흔한 엄마, 아빠조차도 내뱉기를 꺼려했다.
언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소근육 발달을 위해 달걀 까기와, 페트병에 콩 집어 넣기 등 손가락을 세심하게 움직여야 하는 활동을 계속해서 시키고, 대근육 발달을 위해 날씨만 좋으면 놀이터, 공원, 산, 키즈카페로 데리고 다녔다. 둘째 아이 출산이 다가올 무렵에는 첫째 아이와 둘이서 놀이동산도 다녀왔다. 걷기도 싫고 유모차 타기도 싫다는 아이를 안고 놀이동산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무엇보다 책을 열심히 읽어주었다.
어딜가든 책을 들고 다니면서 아이가 최대한 많은 어휘와 이야기, 지식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노력했다.
드디어 둘째 아이가 태어난 날, 그간의 노력으로 한 단어씩 겨우 내뱉던 아이는 아빠와 둘이 집에서 자고 난 다음 날 엄마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완성된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이 아빠랑 자고 엄마한테 왔어요. 엄마 많이 아파요?"
30개월 때의 일이었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출산한 몸인 것도 잊고 첫째 아이를 데리고 병원 밖으로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동생의 존재가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제법 형 같은 태를 갖춘 채 완벽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가 너무 좋아서 밖에 나가면 안 되는데 너 데리고 밖에 나갔잖아.”
아이에게 이야기 해주었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나가면 안 돼?”
“응. 원래 출산한 직후에는 몸조리를 잘해야 하거든. 찬 바람을 쐬거나 그러면 몸에 안 좋대.”
“그래서 나중에 아팠어?”
“아프긴 했어.종일 찬물에 팔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발바닥도 너무 아파서 서 있기가 힘들었어.”
사실 이건 산후 조리와 관련 있는 통증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나는 첫째 아이를 낳고서도 아이가 입원하는 바람에 산후 관리를 제대로 못 했고, 둘째 아이를 낳고서는 첫째 아이를 돌보겠다며 조리원에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갔기 때문에 사실상 산후 조리가 불가능했다. 한동안 온몸이 아팠던 건 그래서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눈이 빨개져서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왜? 엄마 아팠다니까 미안해서 그래?”
“응.”
“괜찮아. 그래서 엄마가 운동 열심히 했잖아. 안 아프려고. 지금도 안아프려고 운동 열심히 하는 거고.”
표현하기를 쑥스러워하는 아이는 나를 더 세게 끌어안는 걸로 고마운 마음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아이에게만 고마운 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이에게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이가 느리다는 사실은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걸 다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때 이후로 꾸준히 이어온 노력들을 책으로 써냈고 조금은 특별한 삶을 살게 되었다.
모든게 특별한 내 아이 덕분이다.
아이는 지금 건강하고 평범하게, 그리고 또래에 비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게 잘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