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썬>을 봤다.
* 스포일러 포함
꽤 많은 OTT 서비스에 가입되어 있다. 언젠가는 꼭 보겠노라고 결심한 영화나 드라마 등의 7할 정도는 언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꺼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버거워서' 그렇다. 요 몇 주 동안 <체인소 맨>은 우울해서, <어나더 라운드>는 요란해서, <플리즈 라이크 미>는 우중충해서, <1917>은 숨 막혀서 처음의 몇몇 장면을 넘기지 못하고 꺼버렸다. 감정의 진폭이 커지는 것이 '버거워진' 시기를 몇 년 동안 겪으면서 생기는 일이다. 대부분 꾹 참고 다 보면 꽤나 좋아할 것 같은 작품들인데, 예전에는 존재도 몰랐던 감정의 벽을 넘어야만 무언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속상하고 힘들다. 언젠간 반드시 보리라, 저 위의 것들 외에도 나의 리스트 속 수많은 컨텐츠들을.
그런 나에게 영화관에 가는 것은, 나의 수족을 묶어서라도 그 영화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발적으로 절대 약이나 영양제 따위를 먹을 리가 없는 고양이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억지로 입을 벌리며 약을 먹이는 것과 같은 이치의 행위이다. 태어나서 영화 상영 중간에 극장을 떠난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예외적인 경우였고 아마도 다시없을 일이다(가장 뒷 줄에 홀로 앉아있다 조용히 나갔기 때문에 누군갈 방해하지 않았으리라 믿고 있다).
<애프터썬>은 집에서 봤다면 절대 끝까지 보지 못했을 영화다. '봐야 하는데'라는 나만의 의무감을 계속 가졌을 테고 주위에 "언젠가 꼭 본다."라고 말하며 다녔겠지만 아마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딱 한 번 영화 상영 중 극장을 떠났던 그때의 이유는 영화의 조악함 때문이었는데, 좋은 영화를 봄에 있어서도 극장을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속 불쑥불쑥 나오는 잔인하거나 비위 상하는 장면을 볼 때도 '조금만 참자'는 느낌이지 떠나고 싶지는 않았고 <가버나움>처럼 말문이 막히는 비극 앞에서도 끝까지 그것을 목도하고 싶은 느낌이었지만, <애프터썬>의 그것은 달랐다. 떠날 수 있으면 떠나고 싶고 모를 수 있으면 모르고 싶은 그런 마음. 사지가 묶이고 입을 붙잡혀 억지로 약을 먹는 고양이가 결국은 건강해지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이기는 했다.
아빠, 캘럼
젊은 아빠이다. 딸과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날까 말까 한, 보아하니 이혼 후 따로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딸과 둘이 여행을 왔나 보다. 세상 사람들이 스테레오타입으로 그리는 딸바보 아빠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가끔씩 문득 달라 보인다. 딸바보 아빠가 딸과 함께 있는데 저렇게 그늘져 있는 모습을, 지금껏 어떠한 다른 컨텐츠에서도 보지 못했다. 자식들이, 혹은 세상의 시선들이 간과하곤 하는 '아버지의 그늘'이라는 클리셰에 집중하려나 싶은데 딱히 그러지도 않는다. 그늘이 점점 짙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씩 흘림으로써 유추하게 한다. 아 뭔가 힘든 일이 있구나, 어쩌면 우울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나 보구나, 태극권이든 뭐든 하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구나, 그렇게 영화 내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아, 아마도 죽으려나 보구나.
딸, 어린 소피
열한 살의 소녀이다. 아버지와의 여행이 그저 신난다. 돈이 모자란 듯 해 전전긍긍하는 아빠의 모습에도 눈치껏 모른 체 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즐기는 구김살 없는 모습. 아빠와 물놀이하는 시간도 즐겁고, 몇 살 많은 언니 오빠들 무리에 끼면서 어른 행세 하며 노는 것도 즐겁고, 몰랐던 세상에 아빠 몰래 눈 뜨는 것도 즐겁다. 스쿠버 다이빙은 최고의 경험이다. 아빠가 가끔씩 이상하게 굴고 기분이 나빠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크게 어긋나거나 사고를 치지도 않고, 아빠의 생일 축하를 위해 소소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기도 한다. 며칠 더 머물고 싶은 여행이지만 떠나기 싫다며 생떼를 쓰지도 않고 엄마에게 돌아갈 때 밝은 모습으로 아빠에게 손을 흔들며 떠난다. 어떻게 저런 애가 있지, 싶을 정도로 착하고 밝고 똑똑해 보인다.
현재의 소피
영화를 한참 보다 보면 이 영화가 현재의 소피 시점의 회상임을 알게 된다. 20여 년 전 아빠와의 여행을 회상하면서, 꿈속에서 춤을 추거나 절규하는 20년 전 아빠를 마주하며 점점 가까워진다. 꿈속에서 옛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 소피의 모습에도, 잠에서 깨어 배우자의 생일 축하 키스를 받고 우는 아이를 달래러 가는 소피의 모습에도, 열한 살 때 아버지와 여행 가서 찍은 캠코더 속 영상을 돌려보는 소피의 모습에도 열한 살의 소피는 남아있지 않다. 꿈속의 어두운 댄스플로어에서 저 멀리 춤인지 절규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을 하던 아빠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 마침내 그를 끌어안지만, 아빠는 결국 멀어지고 어딘가로 떨어지는 듯하다.
극장을 나가고 싶었던 이유 - 불확실성의 끔찍함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고 괴로웠고 극장을 떠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저 모든 것을 '암시'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불안은 언제나 불확실에서 비롯된다. 어떠한 일에 있어서 설사 결말이 최악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그 최악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결말이 나기 전의 불안함보다 덜 부정적일 때도 많다. 저 아빠는 너무나 우울하고 불안해 보이는데,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같은데, 어떤 것도 명시하지 않고 암시만 한다. '아빠가 자살하려나 보다'라는 추측을 어느 순간 확신으로 전환한 사람들에게야 이 영화의 흐름이 명명백백히 그 전제를 뒷받침한다고 보였을 것도 같다. 물론 슬프고 괴로웠겠지만, 차라리 그렇게 받아들이고 영화의 흐름에 따라갔으면 아마 나보다는 훨씬 덜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캘럼이라면 - 결심과 발버둥 사이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의 생각처럼 캘럼이 저 여행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면 저 때 캘럼의 마음은 어땠을지. 저 여행을 캘럼은 무슨 마음으로 출발했을지.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도 아픔이었다. 어떠한 결심을 한 상태에서 떠났을까, 아니면 저것도 마지막 발버둥이었을까? 딸과의 마지막 추억을 쌓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딸을 통해서 어떻게라도 동아줄을 만들어서 잡고 싶었던 걸까?
이마저도 영화에서는 어느 쪽으로든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점이 참 멋지면서도 나를 힘들게 했다. 여행 첫날부터 강박적으로 소피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캘럼의 모습에서는 이미 그의 부재를 대비시키는 듯도 하지만, 처음에는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그의 그늘이 짙어질수록 점점 씀씀이가 커지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어쨌거나, 여행이 끝나기 전, 그러니까 소피와 함께하고 있던 어느 시점에든 결심이 굳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그 와중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는 말해도 좋다는 듬직한 아빠의 모습을 보인다. 물론 보는 우리는 그마저도 위태위태해 보이지만.
결심이 굳어지고 나서 소피와 함께 하던 시간 동안 캘럼은 어떤 생각과 마음이었을까. 한 순간 한 순간이 참으로 소중하면서도 아렸을 것도 같다. 절박하고 미안했을 것도 같다. 어쩌면 그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래 보이는 순간들도 있었으니까. '아버지'로서의 마음이나 태도야 내가 감히 추측하거나 재단할 수 없었을 테지만, 딸에게 호신술을 가르쳐주고, 당신에겐 무슨 이야기든 다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장면에서의 절절함의 정도는 보이는 것도 같다. 하루에도 수 천 번이 결심과 발버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을 것도 같다. 이렇게 보고 싶으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고 싶으면 저렇게 보인다.
내가 캘럼과 함께한 소피였다면 - 왜 모두가 상실과 죄책감만 이야기할까
스포일러가 포함된 이 영화에 대한 감상과 평론에서 모두가 현재 소피의 상실과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점점 그늘이 짙어지는 캘럼과 어쨌거나 너무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린 소피의 모습이 계속해서 교차되어 더 그래 보일 것도 같다. 어느 평론에서 본 것처럼 캠코더 화면이 아닌 과거의 회상이 그 당시에 대한 완전한 재현이 아닌 소피의 회상에 상상을 더한 것이라면, 현재 소피의 꿈속의 장면과 덧붙여 봤을 때 어떻게든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소피의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풍경이 주는 기쁨과 동경하는 세계가 가까이 있음에 대한 신남,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것. 모두 그 나이의 소년소녀의 삶에서 심지어 여행 중이라면 마땅히 누려 마땅한 것들. 그것을 온전히 누리던 착하고 밝은 소녀 소피의 옆에서 아빠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 속 과거의 회상 장면은 어쩌면 소피가 '이때 아빠의 이 모습이 아빠의 그늘을 보여주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이때 아빠는 자기를 좀 알아봐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건가?', '이때 아빠는 결심했었나 봐' 같은 뒤늦은 회한이 맞을 것도 같다. 나는 내가 누려 마땅한 것들을 누리고 있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아빠를 잃었나, 내가 좀 더 알았더라면, 하는 죄책감.
하지만 나는 소피의 그 회한을 그저 상실과 죄책감, 그리고 아빠에 대한 애도 정도에서 끝내는 것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내가 소피였다면, 지금의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은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에 덧씌워진 상처, 그리고 내가 몰라도 되는 것들마저 굳이 아빠의 죽음과 연관 지어 생각나게 된 것에 대한 원망일 것이다.
마땅히 느껴야 하는 감정과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
초등학생 시절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노는 모습은 멋져 보이고, 나도 저 사회에 끼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소피도 그랬을 뿐이다. 심지어 여느 아이들처럼 사고도 안 치고 건전히(?) 선도 잘 지켜가면서. 숙소에 어른들 보는 자극적인 잡지가 있는데 어느 초딩이 그걸 펼쳐보지 않겠나. 처음 이성을 보고 설레는 경험이, 어떠한 거슬리는 것이나 방해 요소 없이 완벽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질 리도 없다. 소피도 그랬을 뿐이고,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누가 봐도 좋은 딸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너무나 무너져있었을 뿐이다. 소피가 무엇을 했으면 아빠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봐도 없었을 것 같은데, 소피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그 시절 마땅히 느꼈어야 했던 감정들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걸까?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너무나 신났던 소피는 그 이후 스쿠버를 할 수 있을까? 바다를 볼 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까? 튀르키예 숙소에서 아빠가 문을 열어주지 않던 밤 동성 커플이 키스하는 모습을 처음 지켜보게 된 것을, 그의 파트너와 처음 키스했던 순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어떤 일이든 당신에게 말해도 된다고 말했던 아빠는 어디에 있었을까? 떠남을 알고 있었다면, 결심이 끝났다면, 그 말은 왜 남겨놨던 걸까? 소피의 죄책감 뒤에는 죄책감을 넘어선 원망이 있지는 않을까? 꿈속에서 아빠를 이해하고자 애타게 찾는 모습은 어쩌면 아빠의 사과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것을 초월한 '용서'를 해보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소피의 마음 속 아빠가 단순히 원망의 대상이기만 하지는 않았겠지만, 원망의 마음이 꽤 크지는 않았을까?
다시, 내가 캘럼이라면
그 여행이 결심이었든 발버둥이었든, 캘럼은 분명 소피와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소피라면 굳이 남은 삶의 많은 부분을 아픈 기억 투성이로 만들어 버린 그 여행이 원망스럽겠지만, 내가 캘럼이어도 그 여행은 갔을 것 같다. 이미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기에 그 시간이 오로지 스스로를 위한 것이어야 했다고 캘럼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소피와 함께 하는 자체로서 소중한 시간, 소피에게 '무언갈 해준다'라는 자기만족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야 납득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캘럼은 소피에게 너무나 미안했을 것 같아서이다. 돈이 없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그 여행 자체를 오게 만들어서. 만약 캘럼이 소피에게 남긴 짧은 편지가 절절한 사랑이 아니라 절절한 사과였다면 소피의 상실감은 아주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았으려나. 하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너진 것은 캘럼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마저도 사치스러운 폭력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찬찬히 곱씹고 소화하고 생각하고 알아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그러고 나서의 감정의 증폭이 어마어마한 영화가 있다. <애프터썬>이 그러했다. '왓챠피디아'에 홀로 남겨보곤 하는 별점을, 하룻밤 자고 일어난 오늘 슬며시 0.5점을 올려뒀다. 나에게는 또 다른 그런 류의 영화였던 <문라이트>의 감독이 발굴한 신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고 하니, 그런 류의 창작자들끼리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나 싶기도 하다.
영화 시작 전에는 당연히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는 사전 정보가 영화를 보고 난 뒤 당연히 새삼 아프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잔인하게도 봉준호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인용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수상 소감이 떠오른다. 이해가 되었든 용서가 되었든 아니면 단순한 극복이 되었든, 이 영화가 샬롯 웰스 감독의 더 멋진 작품의 토양이길 기대하면서, 그의 행복을 바란다. '감독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감상을 남기게 되는 영화는 처음인 것도 같다.
'Cause love's such an old-fashioned word
And love dares you to care for
The people on the edge of the night
And love dares you to change our way of
Caring about ourselves
This is our last dance
This is our last dance
This is ourselves
Under pressure
사랑은 그저 진부한 단어일 뿐이니까
사랑은 감히 밤의 벼랑 끝에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지게 하니까
사랑은 감히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꾸니까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야
억압 속에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