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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n May 04. 2019

연애와 고양이 - 기대한다는 것

싱글은 왜 연애 대신 고양이를 고민하게 되었나

군 입대 초반, 더 자세히는 TV를 볼 수 있는 자대에 배치된 초반의 유행가는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태양의 <나만 바라봐>가 최고 인기곡 중 하나였다.


내가 그렇게나 충실했던 여자친구에게도 차여야 했던 시절 그 노래 가사는 짜증 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 마,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 마 베이베'

뭐 저딴 게 다 있나, 싶었지.


그 이후 10년의 시간이 지나, 연애라는 것의 대체제로 고양이를 떠올리다가

이 노래가 다시 생각나는 바람에 내가 그것을 주저하게 될 줄이야.




지금껏 내가 키워본 유일한 다른 생명체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올챙이었다.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쏙, 까지는 했는데, 앞다리가 나와야 할 무렵 그만 죽고 말았다. 어찌나 서럽던지, 어찌나 미안하던지. 개구리가 되면 늘 소풍 가던 산에 올라가 계곡을 찾아서 보내주려고 부모님 허락까지 겨우 받아놨었는데. 그 사건 이후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 달라고 조르지 않았고, 강아지를 키우자고 해도 어린 시절 키우던 강아지를 사고로 잃은 적이 있던 엄마가 반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다. 내가 정붙인 누군가가 나를 먼저 떠난 아마도 거의 첫 기억인데, 그 이유가 '죽음'이라는 것이 아마도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그러니까 유치원에 갓 다니던 시절에도 잊지 못할 이별(?)의 순간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새벽에 잠에서 깼다. 그전에는 그런 일이 한 번 도 없었으리라. 잠에서 깨니 목이 말라 엄마에게 물을 달라고 했던 것 같다. 엄마를 부르고, 대답이 없었다. 아빠를 부르고, 대답이 없었다. 안방에도 마루에도 주방에도 화장실에도 부모님이 없었다. 깜깜한 새벽이었다. 갓 다섯 시가 되었었나 모르겠다. 너무 놀라 한참을 울며 불며 난리를 치다가,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차려입고(와중에 나름 꽤 신경 썼던 것 같다), 옆집 문을 두드렸다. 서울 살다가 지방으로 이사간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이웃집이 얼마 없는 때였다.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옆집 아주머니는 그 문을 두드린 것이 다섯 살의 나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라셨고, 애가 울면서 뭐라 뭐라 하니 일단 날 집에 들여 주시고, 또래였던 그 집 아들을 깨워 나와 놀게 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감사한 분인지.


알고 보니 신앙심 깊은 우리 부모님이 몇 달간의 나의 수면 패턴을 지켜보신 결과 새벽기도회에 나가도 괜찮겠다는 판단 하에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기도에 나갔다 오신 것이었다. 집에 와보니 애는 없어져 있고. 소스라치게 놀라셔서 교회며 경찰서며 119며 오만 데 전화를 하시고, 거리에 뛰쳐나가 새벽기도 후 귀가하던 온 교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시고 아무튼 동네가 난리가 났더랬다. 등잔 및이 어둡다고 바로 옆 집에 있던 나를 찾는 데는 몇 시간이 걸렸었고,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더랬다. 그 이후 한동안은 누군가라도 내 곁에 있다가 떠나는 것이 그렇게 무섭고 서러웠던 기억이 난다.




누가 날 떠나는 것이 무서울 때,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굳이 그 무서움을 극복해내지 않아도 된다. '날 떠나는 것이 무서울 정도의 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즉, 관계에 대한 모든 '기대'를 하지 않아 버리는 것. '무서움'에서 비롯된 그러한 습관은 몇 번의 배신감과 몇 번의 지루함과 몇 번의 실망감 등을 통해 고착화되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지만, 재미도 없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관계의 재미'를 느끼는 것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그렇게 새로운 관계에 대한 의지가 점점 줄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을 거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지만 그만큼 새로운 기대가 없기도 하다. 이것이 즐거울 것이고 설렐 것이라는 예상이 되지 않는다. 


저 좋은 사람도 결국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면에서 날 피곤하게 하겠지, 이러한 면에서 날 실망시키겠지. 그뿐인가, 나도 누군가의 기대를 실망시킬 것이다. 처음엔 착한 줄 알 테지만 몇몇 모습들을 보고 실망할 테고, 섬세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신경해서 실망할 테고, 혹은 섬세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진절머리날 정도인지는 몰랐을 수도 있고. 


'연애 안 하니?'라는 질문에 누군가가 '고양이를 키울까 봐'라고 대답했을 때, 그 대담이 나에게 솔깃하게 다가왔던 것 또한 어쩌면 고양이와는 '기대'를 덜 주고받아도 될 것 같아서였던 것 같다. 고양이는 처음 만났을 때 기념일 같은 거 왜 챙기는지 모르겠다고 해놓고서는 100일 후에 토라지지 않을 거야. 고양이는 집 밖으로 잘 안 나간다고 하니까 갑자기 다른 집사에게 홀리거나 하지 않을 거야. 고양이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하니까 혼자 있는 게 편한 나를 너무 자주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라는 새로운 기대감 - 나에 대한 기대가 적을 것이라는 기대감- 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뭐 어떡해 동물인데...라는 식으로 나도 기대를 덜 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이 물고 물어 어쩌면 정말 고양이를 키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기까지 날 이끌었던 것 같다.




다만 '기대하지 않는 습관'을 오랜 시간 관성처럼 가지다 보니, 그것의 근원이 된 이유 중 하나를 내가 잊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올챙이. 앞다리가 나기 직전에 배를 뒤집고 어항에 떠 있던 그 올챙이. 어쨌거나 고양이는 나보다 빨리 죽을 텐데. 고양이를 키우지 않고 지금처럼 살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는데, 왜 굳이 고양이를 데려다 와서 언젠가의 그 아픔을 기다리며 고양이를 사랑해야 할까? 앞서 생각한 허다한 고양이 입양의 장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놈의 가사, '나는 너를 잊어도 넌 나를 잊지 마' 처럼 '나는 먼저 죽어도 넌 먼저 죽지 마',라고 말하고 싶어 지겠지만 높은 확률로 그렇게 안 될텐데. 그렇게 서로에 대해 덜 기대한다고 해도 어쨌거나 오랜 시간 함께 하다 보면 정이 들어 마음이 깊어질 텐데. 근데 내가 걔를 보내야 할텐데.


먼 훗날 만약 내가 결혼을 하여 애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전형적인 라이프사이클에 들어있는 것이니 그 안에서 내가 겪을 아픔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지도 않은 존재를 굳이 들여다가 내가 왜 아파야 할까. 그 아픔을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올챙이 죽은 날 참 많이 슬펐는데, 반려동물을 사랑하며 키우다 떠나보낼 만큼 나는 성장해 있는 걸까.




"내가 집착해도 넌 절대 하지 마, 나는 먼저 죽어도 넌 먼저 죽지 마"


정도가 나에게 만약 반려묘가 생긴다면 그에 대한 나의 바람이 될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을 나도 알고 있다. 고로 당분간 나에게 고양이가 생기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는 이야기를 한 집사에게 말했다. 꽤 조심스럽게. 두 마리를 키우다가 한 마리를 보내고, 남은 아이가 너무 쓸쓸해 보여 다시 새로운 고양이를 입양한 경험이 있는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세상이 다 그렇죠 뭐. 나도 언젠가는 누군갈 남겨두고 죽을 건데. 잘 보내 주고, 잘 살아야죠."


맞는 말이다. 사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키우던 고양이가 죽는다고 해도, 그가 죽기 전까지 그 고양이가 행복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잘 떠나보내 주고, 남은 몫까지 잘 살면 되는 것일 거다.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왜 그게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결국은 '기대'의 문제인 것 같다. 내가 남에게 기대하는 것을 점점 하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남들에게 기대받지 않게 되기를 점점 바라 왔다. 그렇게 하면 상처를 감당하기 쉬워지지만, 관계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진다. '자, 그럼 이제 그런 습관을 버리고 관계 속에서 기대를 주고받으면서 사세요!'라고 손쉽게 누군가가 솔루션을 내린 들,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다. 고양이든 연인이든 누군가가 나의 기대가 되는 것이 버겁고, 내가 그 누군가의 기대가 되는 것이 버겁다. 쉽게 말해, 제대로 키우지도 못해 놓고 먼저 떠난 고양이를 슬퍼하기만 할까 봐 무섭다. 연인이 나에게 변했다고 말하게 될 그 순간이 두렵다.




비약이 심한 생각을 여러 가지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에 대한 인지가 바로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을 게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입양할 뻔했다가(?) 다른 이에게 넘겨질 어떠한 고양이가 그 덕에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지금으로서는 그 기도와 함께 몇몇 친구 집에 사는 고양이들을 가끔씩 보면서 즐거워하는 정도가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도, 비슷하게 어떻게든 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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