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_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홀로코스트를 보여주는 방법은 담장 위로 뿜어져 나오는 가스실의 연기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성이다. 이 영화는 학살당하는 유대인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고, 아우슈비츠 바로 옆 독일 장교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꿈의 집을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만발한 꽃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잊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에 적응이 될 때쯤, 열화상 카메라로 한 소녀가 보인다. 수용소의 사람들을 위해 먹을 것을 몰래 가져다주고, 악보를 가져와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홀로 온도를 가진 소녀. 소녀는 가해자들의 꿈의 집으로 돌아간 카메라를 피해자들에게 맞추는 유일한 사람이다.
카메라는 피해자를 영화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지우지도 않는다. 엔딩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구역질을 하는 루돌프가 그날 복도에서 본 건 박물관에 모셔져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양들이다. 결국 역사에 남는 것은 당시에 권력을 쥐고 있던 자들이 아닌, 피해자들임을 분명히 한다. 또한, 가해자의 삶을 낱낱이 파헤쳐서 분노를 이끌어낸다던가, 가해자에 이입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 루돌프가 수용소 일을 어떻게 해나가는지, 헤트비히의 어머니가 왜 그 집을 말도 없이 편지만 한 장 남겨두고 떠났는지, 아름다운 정원은 어떻게 꾸며지게 된 건지에 대해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연출은 독일인의 시선인데 그들의 삶 역시 해체되어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카메라는 가해자의 시선으로 홀로코스트를 보여주며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숨기고, 드러내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냥 그 자리에 카메라를 둠으로써 숨김과 드러냄을 동시에 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소녀는 숨겨져 있지만, 드러나 있다. 소녀가 캄캄한 밤에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유대인들을 위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숨겨져야 하는 존재들을 위한 등장인물은 어둠속에 숨겨져 있고, 그런 소녀를 드러내는 방식은 열화상 카메라를 통한 촬영이다. 온기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서는 소녀와 같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을 거라는 일종의 희망을 건네기도 하는.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화면이 몇 차례 제시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손수레를 끌고 긴 거리를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 헤트비히가 집에 머물게 된 어머니에게 정원을 구경시켜주며 길고 긴 마당을 쭉쭉 걸어 나가는 장면, 전출 명령을 받은 루돌프를 찾으러 집 밖으로 나와 긴 길을 걸어가는 헤트비히. 등장인물들은 횡으로 거침없이, 아주 오래 걸어 나가지만 정작 담장을 넘지는 않는다. 담장 밖에 누군가가 있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피해자의 삶을 숨기다가도 강물에서 발견한 뼈 조각, 담장을 가리는 포도나무 줄기들을 보여주며 한번씩 우리에게 그들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의 건조한 카메라들은 담장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하는 가족들을 지켜보며 그들처럼 점차 익숙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만든다. 저 가족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며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들의 눈 앞에 펼쳐진 마지막 씬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사람들이 청소하던 현대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신었던 신발, 그들이 입었던 옷, 그들의 얼굴이다.
역사에 남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은 결국 그들이다.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피해자들을 단숨에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카메라가 그들을 숨기려고 했던 100분의 시간이 무색하게 마지막 5분으로 우리는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된다. 구역질을 하지만 결국 무엇도 토해내지 못한 루돌프는 잊혀지고, 화면이 꺼지고 들리는 비명과 아우성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렇게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는 숨김과 드러냄을 반복하며 우리를 1940년대에서 2024년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럼 우리는 순식간에 카메라 밖에 남겨져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걸 끝까지 들어야할지, 뛰쳐 나와야할지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