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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May 04. 2023

바람과 흰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피크닉 매트를 하나 샀다. 가정의 달이기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피크닉의 달이기도 한 5월. 서울 재즈 페스티벌 같은 축제들이 주말마다 꽉꽉 채워져있고 대학 축제에 오는 연예인 라인업들도 속속들이 올라온다. 굳이 그런 행사들에 가지 않아도 왠지 모르게 이맘때 마음이 늘 붕붕 뜨곤 한다. 근로자의 날부터 어린이 날, 부처님 오신 날까지 공휴일도 많으니 들뜨는 건 나뿐만이 아니겠다. 왠지 '잠시 쉬어가실게요!' 하기 위해 있는 것만 같은 달이랄까. 

황사와 봄비, 종잡을 수 없는 날씨와 일교차로 괜히 섣불리 나들이를 나갔다가 환절기 감기를 얻어오는 4월이 가고, 이제 본격적으로 살갗에 닿는 바람이 따뜻해졌다. 몸이 딱 알맞다고 느끼는 20도 정도가 최고 기온인 날들의 연속. 파란 하늘도 더 자주 모습을 비춰준다. 또 언제 후끈 더워질지 모르니 피크닉을 바짝 즐겨야 할 때다.

집에 있는 거라곤 피크닉 매트보단 돗자리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은박 돗자리. 이 돗자리 위에선 호일로 꼬깃꼬깃 싼 김밥과 삶은 계란을 먹는 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크기에 비해 부피는 또 어찌나 큰지. 쨍한 날씨엔 빛 반사도 상당해서 눈이 아플 정도다. 피크닉은 5할이 날씨 5할이 분위기로 하는 건데 은박 돗자리는 영 성에 차질 않는다. 

예쁘고 감성 있는 걸로 장만해야지, 생각하며 오늘의 집 어플에 '피크닉 매트' 라고 치고 슥슥 넘기다가 하얀색과 코코아색에 가까운 갈색 줄무늬 천 매트가 눈에 들어왔다. '얇은 천인 것 치고는 좀 비싼데..' '방수천이라니까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몇 개의 안좋은 리뷰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제일 마음에 드는 줄무늬 매트로 바로 주문했다. ‘오늘 출발’ 이라는 배송 문구를 보니 벌써 두근거린다. 매트를 하나 샀을 뿐인데 여름을 아주 제대로 맞이한 것만 같아 괜히 이 아이를 어떻게 잘 써볼지 뭉게뭉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선유도공원이 붙어 있는 양화한강공원을 서울에 있는 한강공원 중 가장 좋아한다. 옆동네 여의도한강공원은 사람으로 빽빽한 반면 양화한강공원은 상대적으로 늘 사람이 그보다 덜하다. 선유도공원으로 들어가는 무지개 모양 다리와 그 위에서 보이는 일명 ‘한국의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이유는 모르겠지만 양화한강공원 잔디에 앉아 맞은 편 선유도공원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 파리의 센강이 떠오르는 것까지, 내 눈엔 이곳이 가장 예쁜데. 내가 좋아하는 곳이 사람이 덜 하니 좋은 부분이 더 많긴 하다. 한강변을 따라 쭉 늘어진 나무들 사이 사이에 자리 잡을 곳도 많고, 배달 오토바이들로 시끄러울 일도 별로 없어 바람이 불 때마다 잎들이 출렁이는 소리를 더 자주 들을 수 있다. 

예쁜 피크닉 매트가 생겼으니 5월 안으로 꼭 양화한강공원에 피크닉을 가야겠다. 가방에 가벼운 천매트, 보조배터리, 카메라, 책, 혹시 모르니 한 겹 더 걸칠 수 있는 웃옷까지 넣고 혼자 피크닉을 가볼 셈이다. 나무들이 만들어준 그늘 중 경사가 없고고 아늑한 곳을 찾아 천 매트를 깔고 벌러덩 누워야지. 배고플 수도 있으니 음료수랑 간단한 간식도 싸가야겠다. 몸을 대자로 뻗어놓고 남은 공간엔 손 닿기 쉬운 배치로 물건들을 늘어놓고.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손에 바로 바로 집히도록.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다보면 책 너머로 보이는 나무와 하늘에 계속 시선을 뺏겨 책 한 줄 읽고 흘끔 봤다가, 또 한 줄 더 읽고 하늘 한번 더 보기를 반복할 게 뻔하다. 가슴 팍에 잠시 책을 덮어두고 나무 아래를 올려다보며 사진 몇 장 찍어주고, 눈으로 보는 게 더 이쁜 걸 괜히 아쉬워하며 눈으로 열심히 담겠지. 쨍한 햇살을 막아주는 잎들은 테두리가 반짝거리고 그 잎들이 흔들릴 때마다 틈새로 햇살이 잠깐씩 내 몸 위에 내려앉았다가 사라지면서 틈새 모양대로 기분 좋은 온기를 남기고 갈 거다.

혼자 피크닉을 할 때 좋은 점은 이 모든 것을 어떤 방해도 없이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거다. 간식으로 무엇을 먹을 지부터 시작해서 어디에 자리 잡을지, 어떻게 누울지, 집으로 돌아갈 시간까지 모두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점. 크지 않은 매트를 혼자 독차지하니 뒹굴뒹굴 뒤척일 수 있다는 점.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완전히 철수했다가 돌아와서 다시 짐을 풀어야한다는 불편한 점은 있지만, 되도록 음료수는 덜 마시면서 혼자 피크닉을 즐겨볼 셈이다. 아주 야무진 간식 계획을 세워서 평일 대낮의 낭만을 채워봐야지. 유럽여행을 갔을 때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 여기저기에 대자로 누워 있는 외국인들을 보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도 점심시간에 런치박스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나와 햇살을 만끽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여행객인 나보다도 더 낭만있어보였다. 라틴 쪽에는 아예 시에스타라고 낮잠 타임이 있다는데, 그들과 우리의 행복지수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무면허자로서 늘 갈망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차박’이다. 차 뒷좌석이 완전히 접히는 차만 있다면 전국 어디든 베이스캠프로 만들어버리는 차박. 차로 이동하다보면 이따금씩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에 당장이라도 정차하고 뛰쳐나가고 싶은 곳들이 나오는데, 차박은 그곳에 더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멋진 수단이지 않은가! 면허가 없는 나로선 이 얇은 천 매트 하나가 차박의 대체재인 셈이다. 방금 이 문장을 쓰고나니 유레카처럼 ‘바람과 흰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라는 대사를 단번에 이해하게 됐다. 차가 없으니 걷다가 멈춘 곳에서 주섬주섬 매트를 꺼내 깔고 앉기. 그럼 바로 그곳이 나의 베이스캠프이자 쉼터가 되겠다. 동네 공원에서도, 동해 바다의 모래 사장에서도, 털썩 주저앉아 끝내주게 숨쉴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벌써 신이 난다. 


주문하고 아직 받아보지도 못했지만 벌써 그럴듯한 계획이 세워져 마음이 충만해졌다. 무슨 4만원이나 해, 잠시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벌써 잘 샀다 잘 샀어, 좋은 소비라며 뿌듯해하는 중이다. 받기 전부터 이런 설렘을 주고 앞으로 잘 쓰이기까지 한다면 충분히 값어치 있는 소비인걸. 기본보다 조금 더 큰 3-4인용 사이즈로 샀으니 친구들이랑 놀 때도 가지고 나가야겠다. 올여름을 더 멋지게 만들어줄 아이. 택배기사님 얼른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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