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방 집 외동딸

by 오정

어릴 적 우리 집은 금은방을 했다.


진열장에는 번쩍번쩍한 금붙이가 가득했고, 벽에는 그 시절 개업선물로 많이 주던 벽시계가 가득했다. 정각마다 뻐꾸기 소리가 울려대는 그곳에서 나는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 인생 최초의 닉네임은 '우리 동네 금은방 집 외동딸'이었다.


너무 귀해서 부르기만 해도 아까울 것 같은 금은방 집 외동딸의 삶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당시 아빠는 가게 운영을 담당했고, 엄마는 단골손님들의 장사를 담당하느라 일명 '반지 이모'라 불리며 반지 가방을 들고 매일 출장을 다녔다. 그러자니 새로운 물건을 사입하러 가거나, 수리를 하기 위해서는 귀금속 도매시장인 종로 3가에 자주 오가야 했는데 머릿수 셋 뿐인 집에 인력은 부족했다.


그때, 선택된 것이 바로 나였다.

엄마는 겨우 한글을 뗀 다섯 살짜리 외동딸 유치원 가방에 몇 백에 가까운 현금 돈뭉치와 수리할 금붙이들을 넣었다.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 되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야 해. 그리고 엄마랑 몇 번 갔던 수리방 기억하지? 그 아저씨 찾아가서 가방 주면 된다."


낯선 사람을 왜 따라가면 안 되는지, 수리방 아저씨를 찾아가서 가방을 주면 뭘 해주는지도 모르는 5세의 나는 그저 엄마가 가방에 함께 넣어주는 햄버거 두 개에 마음을 뺏겨버렸다.


유치원 안 가기 = 재밌다

햄버거 = 맛있다

유치원 안 가고 햄버거 먹기 = 혼절


그렇게 나의 서울행은 시작되었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는 차비도 없이 가방 하나 매고 서울로 향했다. 물론 차비를 몇백 배 낼만큼의 돈과 금붙이가 가방에 있었지만 어치피 유치원생은 프리패스.

지하철 1호선에 자리 잡고 앉아 햄버거 하나를 까먹으면서 전철에 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5세 어린이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1시간 반 가량 지하철을 타고 귀금속 도매시장 종로 3가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구경할 틈도 없이 엄마와 갔던 골목길을 되새기며 수리방에 도착했다. 다섯 평도 안 되는 그 좁은 곳에 도착해 가방을 보여주면 아저씨는 가방을 건네받아 엄마가 미리 전화한 대로 일처리를 해주셨다.


그 사이 나는 아저씨가 주는 요구르트를 한 줄(한 개 아님) 손에 쥐고 소파에 앉아 몇 시간을 내리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수십 명에 사람들이 오가며 나에 대한 호기심을 표했지만 엄마가 낯선 사람들하고는 말을 섞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입지퍼를 닫았다.


그렇게 반나절 동안 얌전히 있다 보면 아저씨가 다시 나에게 유치원 가방을 건넸고, 나는 그 가방을 들쳐 매고 다시 남은 햄버거를 먹으며 가게로 향했다.


대체 우리 엄마는 어떤 강심장을 가진 걸까. 엄마는 외동딸의 귀환보다 빨리 도착한 내 가방을 더 반겼고, 나는 손님들의 '어린애가 대단하다'는 칭찬에 한글을 뗄 때보다 더 큰 성취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서울 출장은 계속되었고.. 수십 번 서울을 오가는 사이 외동딸에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업무도 좀 더 구체적으로 늘었다. 가게 청소도 해야 했고, 물건도 팔아야 했고, 시계 약도 갈아줘야 했고, 반지 사이즈 늘려달라면 한쪽 구석에서 망치질도 해야 했다. 물론 서울행은 디폴트였다.


그러나 머리가 큰 사춘기 외동딸에게 햄버거 두 개의 가치는 이미 하락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포기하고 서울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햄버거 두 개? 피식...


그때, 엄마는 너무나 달콤하고 새로운 딜을 걸어왔다. 바로 H.O.T 오빠들 앨범...

하필 오빠들은 내가 꼭 서울에 가기 싫을 때만 컴백을 했던 걸까? 난 오빠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꼭 서울에 가야 하는 팔자였다.


가는 동안 햄버거 한 개, 오는 동안 햄버거 한 개였던 나의 서울길이...

가는 동안 테이프 A면, 오는 동안 테이프 B면 듣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게 나의 유일한 덕질이었다.


그러나 사춘기 여학생은 주목받는 걸 꺼리는 법.

수리방에 도착한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너는 누구니?' '여기에 왜 왔니?'라는 질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탑골공원이었다.

새우깡을 하나 사서 오빠들의 노래를 들으며 비둘기를 향해 새우깡을 던지며 몇 시간을 버텼다.

(그때 들은 노래들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이런 거였던 거 같은데...)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러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내 용돈 내에서 사고 싶은 음반도 사고, 햄버거도 사 먹을 수 있는 나이...

그렇다. 더 이상 엄마의 딜에 흔들리지 않는 언니들의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 우리 금은방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언제나 빼곡하게 반짝이든 진열장은 마치 탈모가 온 것 마냥 자리가 비어가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는 빈 벽시계 칸을 채우지 않았다.


금은방이 빛을 조금씩 잃어갈 때.. 나는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치품을 사기 위해 금은방을 찾지 않았고 그 흐름에 따라 우리 집은 점점 어려워졌다.


나는 아직도 금은방을 닫던 마지막 날을 기억한다.


텅텅 빈 진열장, 텅텅 빈 벽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시계 초침 소리와 뻐꾸기시계 소리로 고요한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나왔다.

그렇게 나의 금은방집 외동딸의 삶은 끝이 났다.


꽤 시간이 지나버려 부모님과 나는 그때의 일을 추억 삼아 이야기할 뿐 잊고 지낸 지 오래다.

어쩌면 부모님은 금은방 폐업을 당신들의 실패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밝은 금은방 조명 때문일까?

나는 유난히도 그 시절을 반짝이게 기억한다.


모든 추억들은 왜곡되고 편집되어 좋게 생각되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그 시절을 비춰주는 금은방의 조명들과 반짝이는 금붙이들이 그 시간들이 더 빛나게 해주나 보다.


지금보다 더 젊고 생기 있었던.. 우리 엄마 아빠의 얼굴부터

반지를 팔찌를 손에 끼어보고 좋아하던 낯선 사람들의 얼굴들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포장을 기다리던 설렘의 얼굴들

가게 앞을 오가며 반짝이던 눈들까지 다 아름답게 기억이 난다.


오히려 내가 보지 못했던 나의 모습만이 후회된다.

좀 더 기분 좋게 다녀오지 못하고 불만 투성이었던 어린 내가 후회스럽기도 하고

너무 경계하느라 친절하지 못했던 서울의 어른들에게도 미안하다.


한 번도 호화스럽게 누려본 적 없는 금은방집 외동딸의 삶이었지만 나는 가끔 그 시간이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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