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글쓰기 교수님
이곳은 교양 글쓰기 수업 교수님 필립의 오피스.
"그래, 정말 많이 놀랐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일주일 정도 데드라인을 미뤄주마"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정말 오랫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래서 글쓰기 교수님들과, 기말고사 시험이 바로 앞으로 다가온 과목의 교수님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물론 고맙게도 내 주변의 친구들이 방을 바꿔주거나 아니면 다른 친구가 내 방에 와서 같이 자주면서 (당시에 내 룸메이트가 조우울증으로 고향으로 내려간 이후였기에) 위로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어진 과제에 집중을 할 여력은 없었다.
"혹시 내가 술에 취해 정말 마음에도 없는 그 애에게 끼를 부렸나? 아니, 나는 끼를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믿었던 그 남자 애들이 이렇게 나오는걸 보면 그 애들이 공모를 해서 N이 나에게 모종의 복수를 할 수 있게끔 한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지? "
무엇보다, 내가 상상하고 꿈꿔왔던 첫경험과 유사한 스킨십들, 첫 키스 같은 것들이 이런식으로 망쳐진것에 대한 분노가 깊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에게 큰 상처와 두려움이 된것은 바로 그 사건에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이 있었던 아이들의 무관심과 내빼는 태도였다.
하지만 필립 교수님이 젠틀하게 나를 이해해주고, 데드라인을 미뤄주겠다고 제안해주신것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원래 글쓰기 과제 데드라인 날짜에 나는 빈손으로 교실에 들어갔다. 각자 정성스래 프린트해 온 결과물을 제출하는데 나만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제출을 마친 후, 필립 교수님은 나를 그윽히 처다보더니, 모두가 있는 앞에서 나를 불러냈다. 아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교수님은 나를 교실 완전한 바깥도 아닌, 그렇다고 안쪽도 아닌, 문가에서 나에게 거의 반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날에도 수업을 하러 나왔어! 그런데 너는 그깟일로 데드라인을 지키지 않는걸 참 당연하게도 생각하는구나! 넌 나약해 빠졌어!"
그 말을 듣고 있던 아이들은 "그깟일" 에 해당하는 일이 뭐였는지 그리고 내가 그 교수님께 이미 분명 데드라인을 미뤄도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귀가 빨개져서 그 길로 수업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미국 대학은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학기말에 평가하는 시스템이 있다. 원래 설문지를 배포한 후에 교수는 그 자리를 비워야 하고, 설문지를 걷는것도 조교나 학생 대표가 하는것이지만 그 교수는 학기말에 모두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초콜릿 칩 쿠키를 나눠주면서 설문지를 배포하고 자신이 직접 걷어갔다.
이후에 이 교수는 내 입을 막고 싶었는지, 또 한번 나를 따로 불러냈다.
아직도 봅스트(NYU의 도서관) 계단 어딘가에 앉아서 그와 나눈 대화가 선명하다.
"You intimidate me"(넌 나에게 위협적이다/넌 나를 위축되게 만들어)
"How do I intimidate you? What does that mean?" (어떻게 제가 당신을 그렇게 느끼게 만드나요? 무슨 뜻이에요?"
"The way you look at me intimidate me" (너가 나를 보는 방식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어)
나는 교수님의 강의에 집중해서 들은것 뿐인데, 질문이 가끔 있다면 질문을 했을 뿐인데 그 사람에게 나의 지극히 성실한 학생으로써의 태도가 위협적이라고? 그 사람이 나에게 사과를 할 줄 알았는데 정말 머리가 터져버릴것 같이 당황스러운 말을 들으니 집에 와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른이라 믿었던, 내가 그렇게 12년의 교과 과정에 온 몸 바쳐 임하며 상으로 얻었던 "미국 명문대"의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식으로 유치한 인격의 소유자라는것이 지금은 "너무나도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되지만 그당시에는 또 한번 세상에 배신당한 기분 이었다.
역시나, 한국에서도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해주기 보다, 남의 불행을 자신의 에고를 강화시킬 좋은 기회로만 삼는것 같았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너가 그럴만 했으니까 그런일이 생기지"
그리고 필립 교수의 경우, 자신의 무례한 Dramatic Episode("지랄 발광"을 조금 유하게 영어로 표현한것)에 대한 변명으로써 "너의 성격이나 존재감 자체가 좀 위협적이다" 뭐 이런 걸로, 마땅히 했어야 할 사과를 대신했다.
이후 나는 가해자 N에게 페이스북 메세지를 남겼다.
"너도 귀한집 아들이니까 실수라고 생각하고 고소를 하진 않을거야. 그렇지만 나도 누군가의 귀한 딸이야. 분명히 알아야 할건 너가 한 일은 범죄고, 만약 나를 마주친다면 너가 나를 피해."
솔직히 귀한집 아들이라 고소를 안한건 아니었다. 그저 한국에 있는 어머니는 아픈 동생을 케어하느라 너무 힘들고, 아버지는 비싼 돈 들여 보낸 유학길에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걸 알게 된다면 혹시 돌아오라고 할까봐 무서웠다.
(많은 성추행, 성폭행, 그루밍 및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이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피해 사실을 알리고 가해자를 폭로한다. 사람들은 "왜 이제와서야, 또는 가해자가 유명해지고 나서야 폭로를 하는거냐?" 라고 피해자들에게 의문을 제시하지만, 피해자들은 피해를 겪고 난 직후부터 자기 자신을 추스리는 데에 바쁘고 그전에 쌓아오던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가해자를 공격할 겨를이, 용기가, 여유가 없는것이다.)
그렇지만 다음에 N과 마주쳤을때, 그를 보며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된 것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