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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Nov 12. 2023

내장 기담

뮤지엄헤드《더비 매치: 감시자와 스파이》박웅규 작가

피부와 내장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나요? 내장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는 이라면, 몸이 뒤집혀 걸어 다니는 존재를 상상해 본 적이 있을 듯합니다. 뱃속이 뒤집힐 것 같다는, 살갗이 뒤집힌 것 같다는, 아픔에 관한 그런 은유 말고요. 그러니까 자기 머리를 자기 항문이나 질구에 넣어서, 피부가 내장이, 내장이 피부가 되어 다시 태어난 듯한 모습을 갖춘 사람 말입니다. 상상 속의 그는 기이한 모습이겠지만, 피부와 내장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를 마주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릴 때 저는 내 몸의 부피만큼 내가 남이 차지할 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성장 할수록, 차지하는 공간이 커질수록, 남의 것을 빼앗아 이렇게 자라난 거라고, 타인의 어깨에 부딪힐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타자의 내장에서 이물감을 느끼는 당신은 살갗의 마주침을 넘어, 내장과 내장의 마주침을 저보다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나와 타자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만일 그렇다면 먹는 행위는 이물을 몸 안에 담는 행위가 아닐 겁니다. “혐오스러운 음식이든, 너무나 사랑하는 대상이든, 어쩌면 먹고자 하는 욕구란 대상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함의일지도 모른다.”라는 당신의 말처럼, 어쩌면 먹고 먹히는 관계는 서로를 만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듣기로 어떤 동물은 자기 자궁에서 나온 새끼를 가장 안전한 뱃속에 담기 위해 새끼를 먹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새끼는 다시금 어미가 되고, 남은 새끼의 입에 물릴 젖이 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 또한 죽음과 삶이라는, 때로는 폭력적인 순환의 고리와 뒤섞여 굴러가고 있음을 되새기게 됩니다. 내장과 피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피부에 생겨난 흉이 “몸 외부로부터의 침식인지, 몸 내부에서의 균열인지” 알 수 없었다는 당신의 말이 환기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병이 있었듯 저 또한 병이 있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수술은 몸의 털을 깎고, 공기를 넣어 배를 부풀린 다음, 수술 기구로 혹을 떼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며칠간 피 주머니를 달아야 했습니다. 배에 달린 주머니 덕에 몸에 고였을 피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달랑달랑. 또 하나의 장기가 생긴 느낌이었죠. 다 나을 때쯤이 되자 의사가 새로운 장기를 제거하자고 말했습니다. 맨손이 관을 죽 잡아 뺄 때 내장을 훑고 지나가는 관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 몸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몸은 껍질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십우도› (2023) 중 아홉 번째 그림은 내장을 통과하는 소의 시선인가요, 아니면 바깥을 내다보는 바깥. 이쪽을 응시하는 내장의 시선인가요? 무엇이건 당신이 양가성에 관심을 둔 점을 떠올려 보면, 둘 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에서 소년이 양껏 잡아먹은 소의 내장이 장기를 통과해 소의 여신으로 거듭나는 걸 보면, 죽음과 함께하는 물질의 변환은 또 다른 탄생의 과정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소는 아직 죽지 않은 걸까요? 소년의 장기에서 피가 분출하는 까닭은 소의 여신이 복수를 행했기 때문일까요? 내장을 더 이상 먹지 않는 당신은 복수가 두려웠던 걸까요? 저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유로 내장을 먹지 않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내장에 관한 이미지는 왕왕 마주치기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길을 걷다가 대창 구이 밀키트 광고물을 발견했네요. 싱싱한 내장은 과거에는 몇몇 이들만이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지만, 공장식 축산업과 유통업, 수도시설이 발달한 오늘에는 남김없이, 걱정 없이,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상품으로 홍보됩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림에서 내장은 예쁘게 손질된 모습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그리기란 부정한 것을 삭제함으로써 매끈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죠. 금기시되어 터져 나오는 것을 매끄럽게 봉합하며 유통되는 광고 이미지와는 차별적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깨끗이 죽어 가공되지 않았더라면 얼굴을 찌푸리게 했을 내장은 그림의 몸을 입은 채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으로 그려진 내장은 과연 어떤 상태인 걸까요? 이 기이한 느낌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외과 의사는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수술을 위해 개복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 마취 후에도 생생히 깨어 움직이는 장기가 눈을 뜨고 있는 사람보다 생의 느낌을 잘 전달해 준다고요. 그러나 당신이 그린 내장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껍질Dummy을 안고 부활하여 여기를 바라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중 내장신의 내장을 그린 ‹Dummy No. 101›은 신은 해부될 수 없다는 관념에 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신마저 난도질하겠다는 도전 의식이 담겨있는 걸까요? 평소 당신의 태도를 볼 때 그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내장신의 내장은 부위 별로 찢겨 취급되는 것들을 다시금 한데 모아 뭉그러뜨린 모습입니다. 단번에 조망이 어려운, 눈으로 훑고 쓸어야 하는 그림. 어디가 어디인지 명확히 알 수 없게 한 구성은 대상을 해부하여 체계화하려는 정복자의 태도와는 다른 지점에 있죠. 내장신은 기다렸다는 듯, 감출 수 없이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부정’의 관념을 내보입니다. 내장신 자체가 사회적 금기가 모여 탄생한 존재니, 신을 난도질하려는 의도냐는 제 질문이 애초에 잘못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내장 그림은 아픔이나 불쾌감, 두려움과 같은 원초적인 감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같은 감각과 감정은 특히 촉각과 관련됩니다. 여기에는 우선 물컹하고 핏기 어린 소재가 불러일으키는 촉각적 효과가 있겠지요. 그림의 바탕재와 촉감 또한 기묘함을 자아냅니다. 먼저, 내장신의 내장을 그린 삼베는 수의에 쓰이는 천이라는 점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까슬한 느낌을 줍니다. 다른 그림들을 보면, 불균질하게 반수된 바탕에 침투한 먹물은 피부의 멍을, 붉은 안료를 뒷면에 칠한 비단은 핏기가 성성한 반투명한 살갗을, 종이 전면에 바른 붉은 돌가루는 엉긴 핏덩이를 연상케 하죠. 이 같은 재료는 미묘한 자장으로 서로를 당기며, 보는 이의 촉각을 예민하게 일깨웁니다. 낯선 존재가 피부를 타고 기어오를 때의 소름, 살갗이 까인 아픔, 무언가를 삼켰을 때 메슥거리는 기묘한 감각을 말입니다. 요즘 저는 제 안의 수많은 존재들을 깨닫고 있습니다. 남의 자리를 침범한다는 생각을 넘어, 나라는 신체를 배지培地 삼아 존재하는 것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 사라지는 모습을 그린 구상도처럼, 나와 내 몸의 모든 것이 해체되는 상상을 합니다. 그를 자유로 여긴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조금은 덜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 글은 게으른 글이겠습니다만, 당신의 노트에서 마주친 이 말은 당신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상반되는 무엇으로 여겨졌던 존재들의 낙차를 수직이 아닌 수평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당신의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1 [내장] ⑴ 內臟: 척추동물의 가슴안이나 배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기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 ⑵ 內藏: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안에 간직함. ⑶ 內障: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의 장애.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 2023). 

2 [기담] ⑴ 奇談: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⑵ 氣痰: 칠정(七情)이 울결하여 생기는 담. 가래가 목에 걸려서 가슴이 답답하고 거북하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 2023). 

3 이 글에서 큰따옴표 된 문장은 모두 작가의 말에서 인용.



이 글은 뮤지엄헤드의 전시《더비 매치: 감시자와 스파이》(2023. 9. 1. ~ 23.)의 참여 필자로서 박웅규 작가에 대해 쓴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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