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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Dec 09. 2023

《몸이 다시 사는 것과》

박은류 개인전 2023. 12. 9. ~ 15.

웅덩이는 빛으로 인해 모습을 드러낸다. 빛이 있어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인지하며, 그림자는 사물의 존재로 인해 생긴다. 사물 없는 공간에는 빛 혹은 어둠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때 시각 이외에 촉각을 사용한다. 나는 촉각을 사물의 질감뿐 아니라 양감과 크기, 무게를 인식하는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주머니 안을 보지 않고 손을 넣어 속에 든 사물이 공인지를, 어떠한 질감의 공인지를, 그리고 어떠한 크기와 무게의 공인지를 알 듯 촉각은 직관적이고 예민한 감각이다. 풀어 말하면 촉각은 공간을 지각하는 감각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촉각의 세계에서 미와 추는 어떻게 판단이 가능한가. 촉감은 그저 호와 불호에 따른 문제인가. 시각의 세계가 그렇듯, 촉각의 세계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촉각으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이들의 세계를 상상해 본다. 


질문을 뒤로 한 채 글을 잇는다. 시각과 촉각은 연동하는 감각이며, 이는 두 가지 감각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양방향의 경험을 통해 학습한 것이다. 박은류의 작품을 감상할 때도 우리는 눈으로 촉각성을 인지하게 된다. 작품의 재료는 베트남 닥나무에서 뽑아낸 섬유질 반죽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기 몸을 혼자 라이프 캐스팅했으며, 시야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의 작업을 보지 않은 채 몸의 감각에 의지해 만들었다. 작품을 만지는 일은 관객에게 허용되지 않지만, 나는 눈으로 그를 더듬어 나간다. 그럼으로써 작품의 질감과 양감, 무게감을 짐작하며, 작가의 지나간 손길을 되짚는다. 그럼으로써 작가가 몸으로 품고 몸으로 펼쳐나간 것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라는 제목을 부활에 대한 믿음이 담긴 사도신경에서 가져왔다. 박은류의 작품들은 작가의 몸이 있었음을 알리는 흔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재를 통해 그때 그곳에 몸이 있었음을 말한다. 부재로써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업은 몸의 감각-촉각을 극대화함으로써 잊힌 몸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가 라이프 캐스팅을 할 때 손과 팔이 움직이며 근육의 모양은 바뀌었으리라. 최대한 몸을 고정한다고 마음먹었을지라도 조금씩 몸은 움직였으리라. 젖어 있는 닥 반죽 또한 마음대로 통제되지는 않았으리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몸. 그리고 몸이 차지하는 공간을 떠낸 그의 작업은 동일한 틀로써 복제되고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과는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작품들은 박은류의 신체 길이를 반영한다. 좌대는 아시아 여성인 작가 개인의 신체 길이에 맞추어 제작된 것으로, 서구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르코르뷔지에의 모듈러와 차이를 보인다. 라이프 캐스팅한 그의 작품은 신체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사물을 올려놓는 좌대 또한 작품의 경계를 짓기 위함이 아닌, 제작 당시의 높이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 몸을 석고 붕대로 본뜨고, 그것을 다시 착용하여 닥을 붙이는 과정은 일정 부분 자기 몸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작가는 혼자라는 제약 하에서 작업함으로써 몸의 부분을 만들고, 몸은 파편이 되어 다시금 흩어지고 배치된다. 흩어진 파편들은 몸을 해체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작업을 위해 뻗은 손이 달린 작가의 어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입체파가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재조합한 것과 달리, 박은류는 몸의 관절-어깨를 출발점 삼아 작품을 만들고 다시금 공간을 재조합한다. 


동아시아의 회화를 참조하던 박은류가 이번 전시에서 입체를 선보인 이유를 상상한다. 공간을 탐구하는 그의 작품은 일견 부조 혹은 환조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회화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 왔다. 과거 작가는 산수화의 위아래를 뒤집어 양의 공간을 음의 공간으로 치환한 드로잉을 했었다. 노트에는 동양화가 손으로 만지며 감상하는 회화였으며, 닥종이의 질감과 종이에 스민 물감의 반투명한 깊이로부터 아시아인의 피부를 떠올리게 된다고 적었다. 하지만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회화에 대한 관심은 그림과 감상자의 조우, 평면으로 존재하는 종이의 물성, 그리고 피부에의 은유와는 다른 지점에 있다.


산수화의 양의 공간과 음의 공간에 대한 고민은 부재를 통해 현존을 드러내는 일로 이어진다. 몸이 차지하고 빠져나간 자리를 통해 몸을 다시 살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회화에 주어진 조건인 화판의 문제를 다룬다. 촉각성만이 중요했다면 그에게 화판은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작가가 얼굴과 가슴을 대고 닥을 붙인 화판은 원재료인 나무를 드러낸다. 기성품인 화판의 비율과 크기, 두께를 문제시하여 자신의 몸길이를 반영한 화판을 쓰고, 화판의 프레임을 넘어 최대한 손이 닿는 옆면까지 닥을 바른다. 그에게 닥은 화면의 바탕으로서의 종이가 아니다. 그는 닥 반죽을 붓 터치와 물감 덩어리에 비유하며, 한 번 그은 붓질에 가필을 삼가듯 닥 반죽으로 만든 터치를 단번에 남긴다. 정육면체 형태의 작품에서도 맥락은 이어진다. 이것은 기성 화판과 달리 작가의 팔 길이에 맞추어 제작된 것이다. 나는 이를 조각보다는 화판의 옆면이 늘어난 회화라 생각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닥의 바탕인 석고 붕대 또한 회화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 형상의 지지체가 아닐까. 


여기서 그가 닥을 사용하게 된 까닭을 짐작해 본다. 혼돈에서 형상을 건져 올리듯, 그는 닥과 물이 혼합된 웅덩이에 손을 담그고 반죽을 길어 올렸다. 닥을 물감에 비유하는 점은 그가 참조한 정창섭의 작업에서도 발견되는 바이다. 하지만 정창섭의 추상회화와 달리, 그의 작품은 화판의 사각을 벗어나 공간 속의 사물로 존재하며, 인간의 형상을 드러낸다. 박은류는 닥에 부여된 정신성과 한국성의 탐구에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은 재료와의 물아 합일을 이루는 데 있지도 않다. 작가는 손길을 덜어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에게 닥이란 자기 몸을 바탕으로 공간을 탐구하는 매체이자, 감각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직관적인 재료다. 또한 그는 물감 자체의 자립을 꿈꾸며, 때로는 닥에서 지지체를 떼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동아시아의 회화의 표면을 수면에 비유하며 수면을 자기 인식의 장소에 빗댄다. 나는 이런 비유를 무언가가 무언가와 맞닿아 서로를 인지하게 된 순간을 의미한다고 읽었다. 이번 전시에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맨 종이를 사례로 들어보자. 나는 박은류가 붓끝과 종이 표면이 맞닿는 순간, 그리고 물감을 끊임없이 흡수하는 종이를 심연을 안은 수면으로 빗댔다고 생각한다. 닥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감싸여 있다. 손자국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에는 바위에 스민 물처럼 그림자가 고인다. 작품의 표면은 우연히도 그가 작업할 당시 손을 담갔던 웅덩이처럼 보인다. 웅덩이는 빛으로 인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글은 박은류 작가의 개인전《몸이 다시 사는 것과》(2023. 12. 9. ~ 15.)의 전시 서문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기간: 2023. 12. 9.(토) ~ 15.(금) 오후 2시 ~ 8시 휴일 없음

공간: 위상공간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36나길 3 1층

기획, 글: 윤형신

운송: 김재홍, 김인호

설치: 김승규, 임지현, 황예랑, 함성주

사진: 최철림

도움: 박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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