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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사이

김선영 작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문

by 형신

김선영의 작업은 개인, 그리고 개인을 기준에 따라 배제하는 사회를 비유하며, 그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다룬다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림들을 곧바로 사회에 비유하기보다는, 김선영 작가가 그림의 조각과 조각 사이을 통해 시공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이 작가의 독특한 지점임을 주장한다. 감성을 일으키는 부분이 낱낱의 조각일 수도 있지만, 조각들의 사이의 의미도 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2025년 로쿠스 솔루스에서 열린 김선영 작가의 개인전 《파열_열망하는 멜로디》를 중심으로, 최근작을 읽는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그의 오랜 관심사인 파열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파열로부터」


전시장에 들어서면 레드카펫이 깔린 공간에 은빛 거치대로 그림들이 세워져 있다. 작업 대부분은 그림을 오린 후 또 다른 그림에 붙여가며 구성한 것이다. 적색과 녹색이 대비되고, 붓질의 결대로 혹은 결의 반대로 자른 날카로운 색면이 마주쳐 파열음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그림들의 반대편에는 힌트처럼 <파열음으로 가는 드로잉>(2023)이 있는데, 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 위에 동일한 작은 그림이 가볍게 붙어있어 호기심을 자아낸다. 작가에 따르면 <파열음으로 가는 드로잉>은 친구와 산길을 가던 중 원인 모를 소리를 들은 경험을 그린 것이다. 친구는 그 소리가 바위가 파열하며 나는 것이고, ‘생명이 탄생하는 소리’라고 말했다.1) 그리고 작가는 그 말을 ‘큰 산의 부분들이 부서지고, 부서지면서 새로운 부분이 햇빛을 받고 새로운 자연이 생겨난다’라고 해석했다. 그는 10여 년 전에 들은 이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었다가 개인과 사회, 파편과 덩어리의 관계를 고민하며 그렸다. 나는 김선영 작가로부터 파열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균질한 덩어리가 일순간 나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자연이 애초에 균질한 덩어리가 아닌 ‘파편의 합’이라 생각한다 말했다. 파열은 서로 한 몸이 아니었던 것들이 다시 나뉘거나 새롭게 짝을 이루는 생성의 순간인 것이다. 멍든 듯한 살덩어리, 무성히 자라난 나무 등으로 불안을 형상화했던 과거의 작가라면, 산에서 마주친 파열이라는 현상을 두려움으로 느꼈을 수 있을 듯하다. 작은 존재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거대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알 수 없는 시점에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불안. 그러나 작가는 그에 머무르지 않고 파열로부터 생성의 가능성을 발견해 냈다. <파열음으로 가는 드로잉>의 거치대는 그림보다 커서 큰 그림을 위한 자리를 비운 듯 보인다. 작가는 작은 그림으로 보다 큰 세계를 암시한다. 파열로부터 시작했지만, 그를 초과하여 파열로 발생한 미지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산 너머 산이 있기 전에」


전시장을 나온 작가와 나는 산이 내다보이는 카페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산이 우리를 볼리는 만무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마주 보는 것만 같다. 나는 중첩된 산으로부터 작가의 그림들을 떠올린다. 종이 조각이 겹쳐진 개별 그림의 표면은 물론, 레드카펫을 밟고 이쪽을 바라보며 무대 위의 배우처럼 서있는 그들을. 그러나 우리가 있는 지점에서 몇 킬로미터를 움직이면 산은 낱낱으로 흩어져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산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산이 두 개 이상이고, 산 사이에 거리가 있고, 산과 떨어진 지점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시장에서 그림 사이를 거닐며 그림들을 조합하거나 그림으로 이루어진 더 큰 그림을 상상했다. 이러한 전시 방법은 작가가 개별 그림을 만든 방식과도 이어진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이 있는 점과 마찬가지로, 그림 조각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여타 콜라주와의 차이로 김선영 작가의 그림들은 평면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종이 조각들이 회화 표면에 물리적으로는 붙어있을지라도, 회화적 공간 안에서는 떠다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콜라주는 그림 조각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진 상태가 아닐까. 전시장의 <Piece, 또는 포개진>(2024)은 그림 안에 또 다른 그림과 빈 종이가 붙어있고, <작게 숨 쉬는 것들_몰아 쉬는 숨>(2025)은 여러 장의 그림들이 겹쳐져 있다. 이를 보았을 때 작가는 (물리적) 이격 없이 평면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종이 사이에 존재들의 자리를 열어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2024년 작업과 동명의 <Piece, 또는 포개진>(2023)을 ‘산의 풍경과 그 산의 풍경을 담은 엽서, 그리고 엽서에 그림을 그리는 … 나를 포개어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중첩된 그림들을 통해 조각들이 각기 다른 자리를 차지하며 서로 관계 맺음을 보여주었다. 완성된 이미지가 중요했다면 그림의 바탕은 종이 조각에 맞춰 도려낸 공간이 되었어도 관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종이는 얇으나 두께가 있어 의미를 만들어내고 독특한 물성을 이룬다. 그림 조각의 단차는 조각이 바탕을 부유하는 느낌을 주어 부분이 전체에 종속되는 주종 관계를 벗어나도록 한다. 물감과 미디엄이 스며든 종이는 반투명하게 중첩되며 깊이감을 형성하고, 얇은 종이는 구겨지거나 들뜨며 회화적 질감을 만든다. 작가의 작업은 각기 다른 존재들을 병치한 화면일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존재의 사이를 암시한다. 산과 산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작가의 그림 조각 사이에도 미지의 공간이 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산 사이에 계곡이나 물줄기, 바위, 나무와 사람이 있으리라 상상하지만, 산 너머에 어떤 존재가 각자의 사연으로 사는지 모른다. 김선영 작가의 그림은 사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존재의 무한한 분열과 생성을 상상하도록 한다.



「손가락은 손바닥에서 돋아나지 않는다」


평면을 주로 다루어 온 김선영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입체를 시도했다. <매일매일 부서지는>(2025)은 인간 신체를 본뜬 구체적 형상으로, 손은 각각 세 개로도 보이며, 세 개로 이루어진 하나로도 보인다. 그렇다면 세 개의 손은 한 사람의 손일까. 한 사람의 손이 아니면 타인의 손을 감싸 쥐려는 여러 사람의 손일까. 한 사람의 손이라면, 세 개의 손 중 본래의 손이 존재하기는 할까. 작가에게 듣기로, 그는 자기 손을 석고로 떠낸 후 석고물을 추가로 바르고 갈아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석고 손은 작가의 손과 물리적으로 동일한 위상에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완전히 같은 형태도 아니다. 손의 의미를 고민하던 차에 작가 홈페이지를 통해 그가 2013년 수집한 페터 한트케의 시, 「아이의 노래」를 알게 되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에는 없을까?”2) 이 시에 작가가 감응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지만, 나와 세상의 결합과 분열이라는 오랜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시를 참고한다면, 이 손은 자신의 일부를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다시 말해 온전한 남으로 만들려는 객관화의 시도다. 손의 모양이지만, 자기를 형상화한 일종의 자화상이다. 하면, 작가는 왜 굳이 얼굴도 아니고 손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삼았을까. 아니, 정확히 말해 나는 왜 손을 작가의 자화상으로 읽었을까. 이를 이야기하려면 손의 특수성을 말할 필요가 있다. 손은 눈으로 앞뒤를 살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특별한 신체 부위다. 그러나 앞과 뒤의 구분은 눈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즉 손등과 바닥이라는 구분은 180도보다 좁은 시야를 지닌 인간적 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손등이고 어디까지가 손바닥인가. 답이 가장 모호해지는 지점, 지칭하는 이름도 유달리 없는 지점은 바로 손가락의 옆면,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이다. 손가락은 손바닥에서 돋아나지 않는다. 태아의 손은 물을 젓는 노 모양이고, 손가락은 물갈퀴처럼 이어진 피부가 사멸하면서 분리된다. 그렇게 몸의 일부가 사라지며 사이가 만들어진다. 파열은 손가락이 만들어지듯 천천히 이루어지기도 하며, 사멸은 가능성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세포가 사멸하지 않는다면 손가락은 붙은 채 자라나는데, 석고 손에서 붙은 손가락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은 완전히 분화되지 않은 세 개의 손바닥이다. 작가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루어 왔기에, 세 개인 듯 하나인 듯 보이는 손에 나와 너, 그리고 제삼자라는 인칭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칭은 위상에 따라 달라지므로 셋 중의 어느 손도 (여기에 있는 나를 투사한) 내가, 네가, 그가 될 수 있다. 정리하면, 이 손은 나와 너, 그가 불명확한 상황, 즉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너에게 나를 투사하며, 그와도 완전한 남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김선영 작가는 불확정성이 가득한 이 손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았을까. 석고 손에 대한 설명은 아니지만, 사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드러나는 글이 있다. 그는 전시에 페터 한트케의 책을 가져다 놓고 SNS에 발췌하여 적었다.


“멀리 산능선의 파열면은 어느덧 내 안에서 서서히 자리 잡았고, 중심축이 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마치 나 자신이 두 바위 층 사이에 눌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만약 내게 일어난 일이라면, 열려 있음이었다. 만약 일어난 일이라면, 하나의 호흡이었다(그리고 금세 다시 잊힐 수 있었다). 언덕 위 하늘의 푸른빛이 따듯해졌고 비어 있는 땅의 붉은 이회토 모래는 뜨거워졌다. 그 바로 옆 숲에는 소나무들이 풍성한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으며, 널리 펼쳐진 구릉 주거지의 창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짙은 그늘의 띠를 형성했다. 이제 숲의 나무들이 하나하나 전부 보였으며, 영원한 팽이처럼, 나무들은 선 채로 회전하고 있었다.”3)



「그림을 만져도 괜찮습니다」


작가는 그림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 내게 친밀감의 표시로 그림을 만져도 된다고 말했다. 내가 만진 그림들은 콜라주가 주였지만, 전시장의 그림들 중에서도 유독 궁금한 그림은 <작게 숨 쉬는 것들_몰아 쉬는 숨>(2025)이었다. 그 그림은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화면에 남색 바탕이고, 그 위에 또 다른 작은 그림들이 겹쳐진 채 붙어 있는 형상이었다. 상단이 살짝 붙어있을 뿐이라 그림들은 사람들이 일으킨 공기 흐름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움직이는 그림들의 왼편과 오른편에는 노란색 형상이 산 사이에 끼어든 구름처럼 비어져 나와 있었다. 묻지는 않았으나 그림을 만져봐도 된다는 작가의 허락은 그림들을 넘겨보는 행위까지도 열어둔 말일 터이다. 그러나 나는 <작게 숨 쉬는 것들_몰아 쉬는 숨>에서 노란 형상들이 이어져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림 너머의 공간은 그만이 아는 자리로 남겨 두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선영 작가의 최근 세계관은 미완의 시간과 사이의 공간을 긍정 중이다. 작가가 만든 사이는 불확실성과 가능성을 함의한다. 겹쳐 있는 모양을 상상하도록 하고, 존재를 포용할 자리를 만든다. 너와 내가 있는 까닭은 너와 나 가운데 사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닿지 않지만 언제나 서로를 열망하며 새로운 멜로디로 나아간다.’



1) 이하 작은따옴표 안의 글은 김선영 작가의 말이다.

2) 큰따옴표 안의 글은 페터 한트케의 시 「아이의 노래」다. 김선영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했다. (http://kim-sunyoung.com/)

3) 큰따옴표 안의 글은 페터 한트케가 쓰고 배수아가 번역한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중 「팽이의 언덕」 108 페이지에 수록되었으며, 김선영 작가의 이번 전시 《파열_열망하는 멜로디》에 소개되었다.



이 글은 김선영 작가를 위해 쓴 비평문으로, 수원아트스튜디오 푸른지대창작샘터의 작가-평론가 매칭을 거쳐 작성되었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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