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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잘린 사람에게 할 말이니

나르시시스트 반추 일기

by 김자옥

지하철 안.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생각했다.

‘가지 말까?’

그러는 사이, 지하철은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고 난 반사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퇴사 후 5개월 만에 영서에게 연락이 왔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아니 잊고 싶고, 잊으려 했던 이름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도 놀라웠지만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맑은 목소리로 “한번 보자”라는 영서의 태도에 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영서는 내가 사는 동네로 오겠다며 꽤 적극적으로 나왔다. 동네는 싫었다. 어쩐지 내 경계가 침범받는 느낌이었달까. 그것만 신경 쓰느라 나도 모르게 “그냥 회사 근처에서 보자” 하고 말았다. 후회는 뒤늦게 밀려왔다. ‘뭐야 왜 이렇게 쉽게 응해, 꼭 연락 기다린 사람처럼.’


실은 난 퇴사 직후부터 영서에게 연락이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우린 서로 할 말이 있었다. 연락은 없었다. 괘씸하고 서운하고 나중엔 화도 났지만 ‘어차피 지난 인연이다. 신경 쓰지 말자’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뒤늦은 영서의 연락이 반가우면서도 싫었다. '이제 와서 굳이 볼 필요가 있나?' 하지만 이미 난 승낙해 버린 상태다. 그것도 아주 쉽게.


핸드폰을 꺼내 영서에게 카톡을 보냈다.

[역에서 나와서 걸어가는 중이야.]

먼저 왔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상대방이 조금은 조급하고 미안해지게.

[나 카페 안쪽에 앉아있어.]

놀랐다. 먼저 와 있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서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영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서로 서먹하지 않을까. 자주 가던 회사 근처 카페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숨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불길한 경고음 같았다.

‘돌아서. 들어가지 마!’

카페 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안쪽에서 영서가 보였다. 순간 희미해졌던 기억이 다시 생생히 살아났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하는데 영서가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못 본 사이 얼굴이 더 환해진 것 같네.”

영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더 환해졌다’는 말은 전에도 환했다는 말인데, 난 영서와 보낸 마지막 두 달간 그 어느 때보다 괴롭고 힘들었다. 물론 안 그런 척, 최대한 태연한 척했지만. 영서의 말은 무시한 채 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요즘도 바빠?” 영서의 얼굴에선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야, 말도 마”라며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풀 사람처럼.

“우리 뭐 좀 시키고 얘기할까?”

“아, 그래, 그래. 너 뭐 마실래?”

영서는 머쓱해하며 답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영서는 못 참겠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양 팀장은 아주 난리야. 매일 같이 실적 얘기하면서 직원들을 아주 달달 볶는다니까. 짜증은 또 얼마나 부리는지.”

영서는 열을 올렸지만 난 감흥이 없었다. 전혀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젠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영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시큰둥한 내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 건지. 아니 어쩌면 내 반응 따윈 중요하지 않은 건지. 영서는 계속해서 회사 얘기를 쏟아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한숨을 지었다가, 막막한 얼굴이 되었다.

난 영서를 한참 바라봤다. 이게 원래 영서의 모습이었던가? 회사에서 사람들은 종종 말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사람이 좀 이상해져.”

영서도 이상해진 건가. 5개월 만에 만나서,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이런 말을 한다고?



영서와 나는 말이 잘 통했다. 적어도 한때는. 회사의 새 방침에 열을 올릴 때도, 거래처의 업무 스타일이 못마땅할 때도. 그중에서도 우리가 하나가 되는 주제는 단연 ‘양 팀장’이었다. 양 팀장은 말 몇 마디로 사람을 단번에 기분 나쁘게 하는 묘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양 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영서가 고개를 숙인 채 양 팀장 옆에 서 있었다. 몇 분 뒤, 영서는 내 자리로 와서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 문구는 전부터 이렇게 나가지 않았어?”

난 뭔데? 하며 서류를 확인해 보려다 화들짝 놀랐다. 서류엔 마치 낙서처럼 빨간색 볼펜으로 여기저기 찍찍 긋고 휘갈겨 쓴 메모가 잔뜩 있었다. 내가 작성한 서류가 아닌데도 모멸감이 올라왔다. 영서도 같은 마음일 것 같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 나갔는데. 왜, 뭐가 잘못됐대?”

“그치? 아, 진짜. 언제 이렇게 나갔냐면서 정신을 어디다 두냬.”

“뭐야. 정신은 자기가 없으면서.”

난 일부러 더 영서 편을 들었지만 영서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내가 제일 만만한가 봐. 나한테만 유독 더 그런다니까.”

난 “나한테도 그래”라며 영서를 달랬지만 사실, 양 팀장은 영서에게 유난히 더 무례한 면이 있었다. 괜한 걸 트집 잡으며 신경질을 낼 때도 있었고, 여럿이 있을 때 무안을 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몇 번인가 난 “기분 나쁜 티를 좀 내. 그래야 조심하지”라고 했지만, 영서는 성향상 그러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럴수록 양 팀장은 더 영서를 만만히 대했다. 그래서 난 영서에게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탓에 더 배신감도 컸던 거고.



영서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젠 내 차례인가 봐.”

앞뒤 없는 영서의 말에 내가 “뭐가?” 하고 묻자, 영서는 울상이 된 얼굴로 답했다.

“양 팀장은 무슨 일만 생기면 다 나한테 떠넘기는데, 나가라고 압박하는 거 아니면 뭐겠어? 너 내보내고 이번엔 내 차례인 거지.”

‘너 내보내고’란 말에 날이 섰다.

“양 팀장이 그래? 자기가 날 내보냈대?”

영서는 하소연처럼 쏟아내던 말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난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까지 하지 않은 말을 꺼냈다.

“사표는 내가 자진해서 쓴 거야. 번역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말이 많냐고 하더라. 그러면서 막말을 쏟아내길래 다음 날 바로 그만두겠다고 했어. 부장님 같은 사람 밑에선 더 일하고 싶지 않다고.”

영서는 눈이 동그레 져선 “양 팀장이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하고 물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내 대응도 놀랐으리라. 생각은 가득해도 직접 대놓고 하기 어려운 말일 테니. 나도 이 말을 내뱉기까진 여러 많은 말이 오갔지만 다 설명할 순 없었다.

“그러더라. 그런 사람하고 어떻게 일을 계속해.”

영서는 무안하면서도 참담한 얼굴을 했다. 남아서 계속 그와 함께할 영서의 기분이 어떨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먼저 나를 배려하지 않은 건 영서였다. 양 팀장 말대로 내가 ‘잘렸다’고 알고 있었다면 영서는 말을 조심해야 했다. 잘렸다는 사람에게 ‘너 내보내고’라며 쉽게 말하는 건 듣는 입장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단 뜻이다. 게다가 ‘이번엔 내 차례인가 봐’라며 앓는 소리를 하다니. 먼저 내쳐진 사람에게 위로라도 받길 바랐나? 그것도 내쳤다는 쪽에 붙어 나를 따돌리는 데 가담했던 사람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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