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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런 사람이야.

by 김자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은 사람이 얼마나 타인에게 괴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의 오해로 담임선생님 호리는 학대 교사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우연히 있었다는 이유로 엉뚱한 소문까지 퍼지기도 한다. 학교 측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보다 일이 커져 학교 이미지가 손상되는 걸 우려해 호리에게 모든 걸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압력을 가한다. 호리는 억울함을 토로하며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하지만 듣는 이가 없다. 오히려 해명하려 할수록 더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고 굳어진 이미지는 회복이 안 된다. 점점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싸늘하고 의미심장만 시선만 커질 뿐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사정이나 맥락엔 관심이 없다.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말한다. 전해 듣는 사람도 자기 삶에 크게 영향이 없는 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거나 논리에 맞는지 등은 신경 쓰지 않는다. 쉽고 간단히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구나’하고 만다. 이렇게 낙인이 찍힌다.


어느 땐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출신, 집안 배경, 외모, 신체적 특징 등만으로도 낙인을 찍는 경우도 있다. 그저 추측으로, 혹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나 선입견대로 어떠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바라보기도 한다. 한 가지 일이나 하나의 행동으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낙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진짜는 어떤 사람인지는 사람들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낙인이 찍히는 입장은 다르다. 답답함과 억울함에 더해 때때로 분노도 차오른다. 그러다 점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내 행동이 오해를 살 만했나? 내가 문젠가?’ 하며 자책도 하게 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같은 시선이 돌아오면 무력해지고 낙인을 벗으려는 노력 대신 상황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한다.


영화에서 미나토의 친구 요리는 아버지에게 ‘돼지 뇌를 가진 괴물’로 불리며 학대를 당한다. 학교에서마저 괴물 취급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는데 모든 상황에 태연히 대처한다. 요리는 자신이 괴물이라고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낙인은 결국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되는 법이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숙기가 없다’ ‘활달하지 못하다’는 말을 들으며 점점 그게 진짜 나라고 믿게 되었다. 어디서든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자리가 생기면 어김없이 “좀 내성적인 편이고요”나 “제가 숙기가 별로 없어서요”라는 말로 날 표현했다. 성인이 되고 그렇게 걱정이라던 사회생활도 별 탈 없이 하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정말 나일까?” 난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활발하고 말도 많고, 일할 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부당한 일을 그저 참기만 하는 편도 아니다.


나중에 알았다. 부모님이 말하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그들의 투사가 만들어 낸 모습이라는 걸.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부정적이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자신이 화가 났으면서 상대에게 왜 화를 내느냐고 타지는 것처럼. 부모님은 본인들이 느끼는 자기 자신에 관한 불만과 아쉬움을 나를 통해 크게 확대해서 봤던 거다. 즉 숙기가 없다거나 활달하질 못하다거나 하는 말은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그들이 하는 말대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그게 본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방식에 갇히기도 하고, 타인의 해석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는 객체화된다”라고 했다. 타인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 주체였던 나는 객체로 전환되면서 타인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판단하게 된다. 나의 행위와 존재 전체가 외부의 시선에 종속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다움’이란 과연 내가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내가 규정하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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