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방학, 한 학부모의 고민
아이들이 2주일 간 가을 방학을 얻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방학하고 첫째 날 밤에는 늦게까지 깨어 있겠다고 꼬장꼬장 개 진상을 부려댔다.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으니, 퍽 원 없이 늦잠을 자겠다는 것이다. 참고로 독일 학교는 초등학교들도 보통 아침 8시부터 수업이 시작된다. 그러니 그동안 비교적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던 것은 맞다. 아이들의 주장도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그렇게 신나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 내일부터 시작되는 방학에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디 가까운 다른 나라에 짧게 여행이라도 가야 할까?'
'아니면, 독일 근교에 있는 휴양지를 찾아 며칠이라도 머물다 와야 할까?'
'재미있는 액티비티를 인터넷에서 찾아봐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채워지자 이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 짧은 독일 생활 Tip
한국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우 아이들의 방학에 맞추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휴가를 조정하는 문제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에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개인이 유용할 수 있는 휴가기간은 최소 20일(*주 5일 근무자 경우) 이상이다. 이것 역시 법정으로 보장하는 최소 기간이지, 보통 30~35일까지 넉넉한 편이다. 또한 자녀가 있는 경우, 양육을 위한 이유로 휴가를 신청하는 것을 회사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곤 한다. 즉, 가정과 직업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사회적으로 많이 용인되는 편이다. 즉, 물리적으로 현실가능성은 적어도 수이 확보되는 편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당황하지 말자! 이럴 땐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준비한다! 이럴 땐 나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여 지혜를 구하는 것이 답이지!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자. 나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훈련했던 훌륭한 방법론이 있지 않은가? W-W-J-D (What Would 'Ju-byun-in' Do? / *참고: 이거 아닙니다. / *오리지널: What would Jesus do?) 바로, 주위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다!
떠오른다, 떠올라! 나의 절친한 한국인 친구들이 했을 법한 생각이 떠오른다! 뿅!
'방학이 기회야! 이때 뒤처진 내 자녀의 성적을 잡는다!
남들이 쉬거나 앉아 있을 때, 한 걸음 더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의 지름길이지!
자~ 결정했다! 전속력으로 방학 특강 등록! 촤압~! 끝!'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물리적 거리감은 현실감의 괴리를 낳는 것인가? 독일에 있는 나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왜곡된 생각들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한민국이 낳고 35년 간 키운,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란 인간에게 생판 경험해보지도 않은 독일 부모의 역할은 너무도 고되다.
띠링~ 그때 막내아들의 반 친구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들이 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할 수 있냐고 묻기에 얼마 전에 문자를 보냈었는데, 아이의 엄마가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우리 애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축구 캠프가 있어서 만나기 힘들어. 다음 주에 우리 집으로 올래?>
역시 독일 엄마들은 미리부터 방학계획을 세워 놓는구나. 아쉽지만 다음 주에 만나자고 답장을 쓰고 있는데 아내가 옆에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독일 엄마들은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는대? 나는 도통 모르겠구먼.>
그 소리를 듣고는 쓰고 있는 답장에다 몇 줄을 더 보태어 전송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몸이 더 빠른 편이다. 궁금하면 뒷 일을 재는 것 없이 일단 지르고 본다. 물론 부작용도 더러 있었지만, 한국인으로서 독일 부모 행세를 해야 하는 턱에 부족한 경험을 채우느라 새로이 얻은 독일에서의 습관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음 주에 봐야겠다. 그런데 질문이 있어. 너희는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니? 내 아들도 축구 캠프 좋아하는데 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어.>
띠링! 곧이어 답장이 왔다. 축구 캠프 홈페이지가 연동된 짧은 링크와 함께였다.
<3개월 전에 등록을 마감해야 하긴 하는데, 지금이라도 연락해 봐. 아마 등록할 수 있을지도 몰라. Mads(가명)도 가고 Leo(가명)도 신청했어. 너희 아들도 같이 가면 좋겠네.>
오호라. 그래 독일에서는 일단 저지는 편이 낫지. 아니면 아닌 거고! 나는 곧바로 홈페이지로 들어가 신청서를 작성하고 전송했다. 3일 뒤 캠프가 시작되는 터라 서둘러야 했기에 (이미 2개월 28일 늦었지만) 이메일이 아닌 문자메시지로 PDF 신청서를 전송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되면 할렐루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일단 접수해 두겠으니, 당일에 캠프비를 현금으로 가지고 오면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문자였다. 야호! 하나 해결했다! 독일의 케바케(Case by case)에 감사하게 되는 날이었다.
* 짧은 독일 생활 Tip
그러고 보면, 독일은 생각보다 관공서의 공적 업무부터 작은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잦은 경우 융통성이 발휘되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넷 블로그 또는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업로드된 글을 살펴보면 이에 관한 여러 불평 사례들이 게시되곤 한다. 예를 들어, 같은 조건의 두 사람이 독일 정착을 위해 비자를 신청할 때, 누구는 무리 없이 승인되는 반면 다른 사람은 문 전에서 박대받는 경우가 생긴 다는 것이다. 소위 '케바케'의 나라 독일이라는 별칭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다.
사실, 이는 과거 서로 다른 정체서의 국가들이 하나로 합쳐진 연방국가(Bundesland)인 독일의 특징에서 영향을 받는다. 주마다 지역마다 처리되는 방식이나 기준이 상이할 수 있다. 불행히도 이는 더욱 사소한 단위까지 동일하다. 안타깝게도 직업현장에서 각 담당자의 재량적 판단을 인정하는 편이다 보니 누구를 대화 당사자로 만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조금만 비틀어 생각해 보면 얼마 간의 작은 빛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불평은 쉬워도 감사는 어려운 법이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결과가 반드시 나에게 찾아오리라는 법도 없다.
물론 누구나 그렇지만,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실패하기를 싫어한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한 뒤, 소위 '꽃 길'을 따라 걸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위 표준화(DIN: Deutsche Industrie Norm)의 나라 독일에서 깊게 고민해야 할 가치는 역설적이게도 '융통성'이다. 따라서 독일에서 생활하는 한국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여유 있게 생각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의 가을방학 활동은 하나 해결해 두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두 명의 자녀들이 남아있다. 자, 이 녀석들은 어찌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을 이어가려는 순간 또다시 띠링띠링~ 연이어 둘째 딸의 절친인 쌍둥이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이번 주에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려고 하는데, 혹시 둘째를 데리고 가도 될까? 우리 애들이 너희 딸이랑 같이 가고 싶어 하네. 가능하다면 답장 줘.>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민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 맘 때 소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보다 또래관계 아니겠는가? 근사한 핑계, 아니 중요한 이유에 대해 확인했으니 답장을 미룰 필요가 없다. 나의 손은 다시 답장을 쓰느라 분주해졌다. 사뭇 경쾌한 타이핑이었다.
<그럼, 물론이지. 수영복과 물놀이 기구, 입장료를 챙겨서 너희 집으로 데려다줄게. 참, 이번에는 꼭 둘째 귀걸이를 빼놓고 보낼게. 지난번처럼 귀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생난리(*독일에선 보통 Theater라고 한다) 치는 일은 없을 거야. 고마워>
이로써 막내와 둘째는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첫째인데. 첫째야 혼자서도 할 것을 잘 찾아 하니까, 내가 데리고 있어도 되겠지. 이 정도는 문제없어.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쉬운 문제는 간단히 넘기려던 찰나 '띠리리리링~'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바로 첫째 딸의 가장 친한 동네친구 루이자(가명)였다! 옆에서 들으니 대충 내용은 이랬다.
<오늘 에밀리(가명) 집에서 깜짝 파자마 파티하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 짧은 독일 생활 Tip
독일에서는 아직도 유선전화(Festnetztelefon)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Telekom, O2와 가은 인터넷 회사에 가정용 인터넷을 신청하면 전화선과 유선번호를 함께 받는다. 요즘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만약 유선전화를 사용하고 싶다면, 매장에서 인터넷 공유기와 유선전화를 함께 구입하면 된다. 전화선이 곧 인터넷 선이기 위해 전화기를 연결하기 위해 따로 전화선을 찾을 필요가 없다.
첫째 딸과 루이자, 에밀리는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이미 오래전부터 끈끈한 하나의 '팸(Familie)'이 되어 교류하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짬이 될 때마다 집을 옮겨가며 1박 2일, 혹은 2박 3일 파자마 파티를 하는 것이 소녀들의 문화처럼 되어 왔다.
그리고 하필 이럴 때 연락이 온 것이었다. 마다 할 필요가 무엔가? 나는 짐짓 너그러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으며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렴.'이라고 허락해 주었다. 내 속에서는 이미 우레와 같은 함성과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어느 아프리카 나라의 속담 마냥 '한 아이를 키우는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번 가을 방학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도움을 준 이웃과 친구들에게 이 글을 빌어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이다. Gott sei D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