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로 이민을 결정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오늘의 글은 특별히 더 개인적인 경험과 그에 대한 생각에 닿아 있다. 미리 언질을 주고. 자, 그럼 시작한다.
한국인에게 '빨리빨리' 문화란?
우리나라의 삶의 편리함을 이야기하려면 이미 외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빨리빨리" 문화를 빼놓을 수 없겠다. 그것은 신속성과 효율성, 편리한 서비스를 대표하는 말이다.
한국인에게 "빨리빨리"란 비단 서비스 분야와 같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개인에게 "빨리빨리"란 무한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의 발버둥으로 읽힐 수도 있다. 성취지향, 목적의식, 전략과 시도와 같은 뜻이 이에 포함된다.
처음 독일로 이사를 결심했을 때.
그러니까 5년 전 독일로 오고자 할 때, 그 선택의 대략 70%는 즉흥적인 상황판단과 결정이었다.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없지 않았으나, 이제 독일어 단어 몇 개 아는 기초적인 수준(A1.2)으로 어린 세 명의 자녀를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이 전세금까지 빼들고 독일로 날아온다는 것이 어디 상식적인가?
그래도 나름 30% 정도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석사학위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사회복지를 했었고, 사회복지 분야는 독일에서 배울 것이 충분하니까. 대학원은 학비도 없다고 하니 우리라고 못할 것 없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사람 앞 날이야 모르는 것이지만, 어학공부 1년, 석사 2년. 그렇게 3년 안에 모든 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겠다 하는 기대가 있었다.
빨리빨리 잘 적응하고 싶었다.
빨리빨리 하고 싶었다. 아니 빨리빨리 "잘" 하고 싶었다. 빨리 잘 적응하고 싶었다. 빨리 잘 성취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시급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 아닐까? 물론 독일지사로 파견된 사람들은 영어로 소통할 수도 있을 테고, 한인 커뮤니티에서 활동을 주로 삼는 사람에게는 그 마저도 필요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 마저도 빨리가 안 되더라. 우리가 독일로 이사한 지 3개월 뒤 코로나 팬데믹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로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독일어는 생각보다 더 더 배우기 어려운 언어더라고.
왜 모두 느린 건데!
내 성취만 늦었을까? 아니! 독일은 모두 느렸다. 인터넷을 연결하기 위해 두세 달이 걸렸고, 비자청에 비자 신청을 해도 서너 달 뒤에 방문이 가능했다. 그마저도 행정기관은 편지로 결정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아, 편지를 보낸 뒤 몇 달간 소식 없는 우편함을 뒤적거리는 일이 잦았다. 이러니 그동안 극한의 빨리빨리에 훈련된 한국인들은 답답함에 속이 터질 지경이 되었다.
이런 내 상황을 이웃에게 토로 할 때면 그저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뭐 좀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조언을 구했는데, 그저 웃고 넘기는 상황이라니! 왜 나뿐 아니라 이 놈의 나라는 모두 다 느긋한 건지. 아,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독일어가 내 맘처럼 잘 늘지 않아 속상하단 사람에게 기껏 위로한다는 소리가 "Wird noch! (언젠가는 될거야)"다. 그건 위로가 아니야! 난 두 달 뒤까진 끝내고 싶다는 말이다!
우린 지금 마라톤 중이라고!
글쎄. 유학 온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독일 생활은 단거리 달리기일 수도 있겠지. 빨리빨리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빨리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바람직할 수도 있다. 사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젠 이민자의 길로 들어서버렸다. 어린 세 자녀들 덕분이다. 애들은 이미 독일 삶에 수이 적응해 버렸거든.
이민자들에게 독일의 삶은 스프린터가 아니다. 장거리 달리기, 아니 그보다도 마라톤에 가깝다. 느리게 더 느리게. 더 많은 느긋함과 여유가 필요하다. 안 그러면 살 수가 없지. 내 성취만 느린가? 다들 느리게 가는데 혼자 바등거리면 복창이 터져 어찌 사누?
독일로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독일에 정착하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몇 마디만 하려고 한다.
"우리 좀 더 느긋해집시다. 빨리빨리, 독일에서 빠른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요?
여러분 오늘도 수고했어요. 오늘도 잘 산 거예요.
목표가 보이지 않죠? 괜찮아요!
왜냐면, 우린 결승전을 보고 달리는 단거리 선수들이 아니니까요.
잊지 마세요! 우린 지금 마라톤 중이에요"
[더 알아보기] 독일 문화 Tip
우리나라에 "빨리빨리"가 있다면, 독일을 대표하는 느긋함의 문화 중에는 "관료제(Bürokratie)"가 있다.
사실 독일 사람들도 이런 독일 관료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놀림과 풍자의 소재로 삼곤 한다. 독일 관청은 전사서류 시스템이 도입된 지금에도 40% 이상의 업무를 종이로만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Ohne Stempel, kein Dokument! (도장이 없으면 문서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독일 관청이 개인에게 결정사항을 통보할 때 편지로 한다는 말을 기억하는가? 그 서류에 만약 관청의 직인과 담당자의 서명이 없다면 그것은 유효하지 않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증명서 원본을 제출해야 할 때, 잊지 말고 관련 서명과 도장을 챙기자. 이것을 몰라서 나는 내 첫 번째 대학원 신청을 말아먹었다. 끔찍한 독일 관료제 때문에!
개인에 대한 문제는 그래도 애교로 치부할 수 있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Flughafen Berlin Brandenburg) 건설 프로젝트를 할 때는 규제문제, 안전 검사, 허가 절차 등과 같은 문서상의 이유로 계속 공사를 지연시켰다. 결국 2006년 착공되어 2011년 완공 예정이던 공항은 2020년이 되어야 완료되었다. 그 사이 수십억 유로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