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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나아진다.

by euuna







다신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은 돌이켜 보면, 전부 처음 해 보는 것들이었다는 거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부터는 조금일지언정, 처음보다는 확실히 나아져 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하다 보면, 능숙해져 있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몰랐을 땐, 마냥 이 처음이 괴롭기만 한데, 처음의 법칙을 깨달은 뒤로는 한 번 중얼거리고 말아버리기도 한다.


'처음이라 힘든 거지.'


언젠가는 익숙해질 일이라.


첫 집을 구해 기뻐 날뛰던 마음도 잠시, 서진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며칠 뒤면 낫겠지 싶었던 감기가 기승을 부렸다. 펄펄 끓는 열, 맛이 가 버린 목소리. 매일 한 침대에서 꼭 붙어 자니 머지않아 나도 옮았다.


멜버른의 겨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추웠다. 어디서 주워듣기론 멜버른은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는 지역이라던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침과 점심엔 그렇게나 뜨겁다가 해가 떨어지고 나면 낯선 추위가 덮쳐왔다. 우리 집은 추위에 아주 취약한 빌딩이었다. 얇고 커다란 창문은 바람을 막지 못했고, 외풍이 심해 이상하게도 바깥보다 집 안이 더 추웠다. 한국과 달리 남방이나 보일러가 없는 호주에서의 추위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입김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 가구를 조립하고 해체하는 일이 쉬워졌다.



호주의 다이소라 불리는 케이마트에서 작은 히터를 발견했다. 히터를 끼고 살았대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린 내내 히터를 틀고 생활했다. 그 작은 게 방 안에 훈기를 더해주고 나면, 그제야 편안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여기 있던 테이블 어디 갔어?”


거실이 이상하게 허전해 졌다며 갸웃거리는 친구, 지예가 물었다.


“그거? 방 안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방 안을 보여주었다.

“그게 왜 방 안에 있는거야.” 집이 춥다며 팔을 쓸어내리는 지예를 방 안으로 데려갔다.


"야. 방 안에서 따닥따닥 붙어 앉으면 생각보다 따뜻해."

"장난하냐? 샀다던 히터는 어쩌고."

"전기세 폭탄 맞는다고 해서 봉인했어."


웃음이 터졌다. 한참을 배를 잡고 웃다가 우리 셋은 의자를 끌어와 쪼르르 붙어 앉았다. 지예는 서진과 같은 반 친구였고 동갑내기에다 같은 지역이란 걸 알고 금방 친해졌다. 어느새 우리는 이런 저런 고민을 같이 나누는 친구가 됐다. 지예는 새로운 집을 구하는 게 어떻겠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잔기침으로 고생하고 있는 서진의 모습이 안쓰러운 듯했다.


"이 집을 어떻게 구했는데!" 서진이 소리쳤다.

"그래! 여긴 우리 피 땀 눈물이야!" 나도 덩달아 소리쳤다.

"아는데, 이러다 건강 다 망치겠다."



- 그렇게 추운 집에도 아침에는 해가 들어왔다.



사실 그렇게 큰 소리를 뻥뻥 치면서도, 이 집에 살기가 쉽지 않다는 건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아늑했던 우리의 보금자리. 우리의 첫 둥지가 그렇게 퇴색되어 갔다. 서로를 끌어안고 자야 하는 방이 아니라, 각자 여유로이 잘 수 있는 방이었으면 했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묶은 때들은 매일 같이 닦는 서신의 손을 퉁퉁 붓게 만들었고 아침에 목격한 커다란 바퀴 벌레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에어컨이 없으니 여름 나기는 당연히 힘들 듯했고 집에 가이 위해 지나야만 하는 길목에는 노숙자들이 줄줄이 앉아 있어 빨라지는 걸음 뒤로 이 컴컴한 거리가 미워졌다. 행운만 가져다 줄 거 같았던 이곳이 불행히 느껴졌다.


두 달 간의 렌트 경험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 청소와 애정은 비례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청소를 하는 만큼 애정이 커졌다. 이 작은 집에서 청소만 일주일 넘게 했다는 건 여기를 무척 사랑했다는 거다.





며칠 지나지 않아, 지예는 다시 우리 집을 찾았다. 셰어하우스 계약이 갑작스럽게 종료됐다는 상황과 함께 말이다. 집주인이 급하게 들어 오게 되면서 집을 비워줘야 한단 거다. 집 구할 시간조차 없는 지예에게는 다행히 우리가 있었다. 별달리 가진 게 없는 우리에게도 유일무이하게 가진 게 있었다.


"너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지낼래?" 내가 물었다.

"뭐?" 지예는 당황한 듯했지만, 고민할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괜찮을까…?"


‘이런 집이라도 괜찮아?’, ‘객식구가 되는데 괜찮겠어?’ 우리는 이런 집이라는 게 미안했고, 지예는 우리 사정에 자신의 사정까지 더하는 거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새집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우리도 한 사람 더 있으면, 집이 더 따뜻해지니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그렇게 알게 된 지 불과 두 달도 안 된 친구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침대는 아무리 붙어 잔대도 셋이서 눕기엔 무리였다. 그래서 거실에 있는 소파를 방 안으로 들였다. 매일 꽃게 걸음으로 다녔지만,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뜻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아주는 지예에게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 아침저녁으로 친구의 짐을 옮겼다.



연이어 새로운 일이 생겼다. 또 다른 친구, 은선이 새로운 셰어하우스를 구해야 한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은선은 서진과 내가 처음으로 친해진 한국인 친구였다. 은선도 우리와 동갑이었다. 그 커다란 학원에서 번갈아 가며 반이 겹치게 돼 급속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서진과 지예는 일을 하고 있어, 시간 많은 내가 은선을 돕기로 했다. 학원이 끝나면 은선을 따라 집을 보러 다녔다. 자연스럽게 멜버른의 지리가 외워졌다. 지독한 길치였던 나에게는 값진 시간이었다.


은선을 따라 함께 본 셰어하우스들은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작은방에 침대만 겨우 넣어두고 셋이서 써야 한다. 든가 (사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만) 여자들만 셰어하우스라고 해서 갔더니, 씻고 잠만 잔다는 남자 주인이 거실 한복판에서 커튼을 친 채 살고 있다는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집들이 다양했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은선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모르겠단 대답만 할 뿐이었다. 함부로 조언하기도 어려웠다. 우리만 유난이 아니었고 내 사정만 사정이 아니었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지예와 은선도 우리 집으로 향했다. 줄줄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친구들과 방 안에 모여 앉아 하루의 회포를 풀었다.


"구하기는 힘들어도 렌트가 참 편한 거 같아." 집을 잃은 지예가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다 같이 사는 거 어때?"



- 마지막으로 합류하는 은선의 이사. 걸어다니는 이사업체 같기도 했다.



누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험난한 여정을 같이 걸어보자며 호기롭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일사천리.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파죽지세. 당장 내일부터 볼 수 있는 인스펙션을 손이 닿는 대로 예약하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 뒤로 어딘가 불안한 마음은,


'그래 처음이라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별거 아닐걸?' 주문을 걸듯 진정시켰다. 어렵게 구했던 집, 두 번째는 좀 더 수월하지 않겠어? 싶은 거다.


눈이 뻐근해질 때쯤 하나둘 침대로 올라갔다. 몸을 가로를 돌려, 좁은 침대에 꼭 붙어 누웠다. 튀어 나간 발이 조금 시렸지만, 누운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했다. 둘도 아닌 셋, 셋도 아닌 넷이라.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아, 어쩌다 함께 살 집을 구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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