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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보금자리

둥지를 틀어봐

by euuna







서진은 내 노래방 18번이 남진의 <둥지>로 안다. 신나는 리듬에 색소폰이 울리면 우리는 자동으로 앞으로 나가 춤을 췄다. 그렇게 서진과 노래방을 갈 때마다 불러대서 인 걸까. 어릴 적 할머니 생신을 위해 연습했던 노래는 어느새 추억의 노래로까지 자리했다. 아무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둥지>로 알고 있는 서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시드니에 도착해, 우리는 짧은 여행을 했다. 난생처음이었던 장기 비행이 부른 벅찬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진정시키기 바빴다. 벌써부터 앞 길이 막막히 느껴진다며 한숨을 푹 내쉬는 서진을 이끌고는 공원으로 가 앉았다. '걱정하지마. 이제부터 우리가 다 알아서 하면 되는 거잖아. 오히려 좋아.' 그런 대책 없는 말을 뱉어가며 통했을지, 그렇지 않았을지 모를 안심을 시켰다.



- 짐 둘 곳도 마땅치 않은 이곳 생활이 재미있었다.


우리의 정착지는 '멜버른'이었다. 시드니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1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서 멜버른으로 넘어왔다. 백팩커스에서 보낸 첫날의 소감은 '신기하다.' 정도였다. 모르는 이들과 방 한 칸에 모여 지냈고 급식소 같은 커다란 공용 공간에서 제 식사를 가져와 밥을 먹었다. 식사하고 있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이들이 모여 우리의 뒷자리에서 노래를 우렁차게 틀어두고 춤을 췄다.


매일 같이 말이다. 둠칫칫 둠칫 둠칫 둠둠칫 리듬이 속도를 높이면 뒤에서는 트월킹 파티가 열렸다. 우리는 그 노래를 '둠칫송'이라 칭했다. 매일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겠다는 서진은 기어코 체하고 말았다. 그놈의 둠칫송. 훗날 라틴 노래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건 우리의 기억 속에 희한하리만큼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겐 백팩커스의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작은 벙커 침대 하나만이 내 공간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아늑하다고 느꼈고 부담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다. 캐리어를 제외하고 필요한 건 전부 침대 끝 쪽에 밀어 두고 지냈다. 우린 백팩커스에서 지내면서 인스펙션을 다녔다. '인스펙션'이란 쉽게 말해,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은 셰어하우스나, 홈스테이 또는 학원이나 학교에서 연계해 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여기 무모한 용감함이 앞선 여성 두 명이 있었다.


우리는 렌트를 선택했다. '렌트'란 월세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증금을 걸어두고 달마다 세를 내고 1년간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무것도 없는 우리는 아파트를 빌리기로 결심했다. 누가 가진 것 하나 없는 우리에게 덥석 살아달라 하겠냐마는, '어쩌면?'이라는 생각에 빠져버리고 나니, 부딪치는 것 말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예산에 맞는 멜버른 시내에 있는 집들을 보기 위해, 인스펙션 예약을 걸어두었다.




- 인스펙션을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 잡혀 있던 인스펙션을 전부 보고 나면, 매일 공원에 갔다.


- 몇 번의 수정과 함께 채워 나가는 세입자 프로필



눈 뜨자마자 튀어 나가, 예약해 둔 아파트를 향해 둘러봤다. 백팩커스로 돌아오면 번역기의 힘을 빌려 어설픈 영어로 이 집의 세입자가 우리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히 소설을 썼다. 이게 통할까 싶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이것 뿐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고 우린 은근히 예상했듯 부동산으로부터 단 한 통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이러다 거리에 나 앉겠다 싶어, 백팩커스 연장을 했다. 다음 날 오후, 리셉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약 사이트 오류로 인해, 이미 누군가가 예약해 둔 방을 우리가 이중으로 예약했다는 거다.


오후 4시. 후다닥 짐을 싸고는 헐레벌떡 나왔다. 백팩커스 문 앞에 서서 멍하니 서 있던 우린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런 일도 있어야 재미있지. 예상 못 한 거 아니잖아! (예상 못했다) 새 숙소 찾으면 되지. 가뜩이나 둠칫송 점점 물려만 갔는데, 잘됐다며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숙소를 찾았다.



- Homeless : 집이 없는 사람



다행스럽게도 어학원 근처, 저렴한 호텔이 있었다. 예약을 마치고 드디어 백팩커스에서 벗어났다. 무거운 캐리어를 끙끙 이끌고 거리로 나갔다. 백팩커스 생활이 힘들었던 서진은 한시름 나아진 표정이었다.


어학원의 첫 학기가 시작됐다. 적응은커녕, 구해지지 않는 집 때문에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근데도 나쁘지만은 않은 생활인듯해 나태해지기까지 했다. 며칠 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진이 제 가방을 뒤적이다, 엘리베이터 바닥 틈 사이로 호텔 키를 빠트렸다. 덕분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몸 누일 공간이 있다고 잠시 착각했던 거 같은데 여긴 한국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인스펙션을 다녔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빨지 못한 옷이 늘어나고 옷장 없는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드디어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얼마나 기뻤는지. 서로를 부둥켜안고서는 한참을 방방 뛰었다. 아, 드디어 해냈다. 정말이지 커다란 퀘스트 하나를 해낸 기분이었다.


부동산과 계약을 마치고 이사 들어 온 날부터 일주일간 청소를 했다. 어학원만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 쓸고 닦는 일만 했다. 퀴퀴한 냄새가 줄어들고 냉장고가 하나둘 채워져 갈 때쯤, 바디워시를 사러 갔다. 그렇게 비싼 바디워시는 생애 처음이었다. 둘이 모아 산 5만 원짜리 바디워시는 둘만의 자축이었다.




- 바디워시를 사러 간 날.



살림살이라는 게 없어, 냄비 받침으로 신문지를 깔았고, 신문지에 뚝뚝 떨어진 라면 국물을 보며, 닦을 필요도 없다며 웃어 보였다. 그러다 신문에서 발견한 스도쿠와 십자말풀이에 빠져 새벽이 될 때까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첫 집은 관심 없던 것도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몇몇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마친 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우리는 노래방 앱을 켜 노래를 불렀다.



-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단 것에 감사했던 날




“여기가 이제 우리 둥지다.” 내가 말했다.

"이 날을 위해 부르고 다녔던거야?" 서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날의 아픔은 잊어버려.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남진의 <둥지>를 불렀다. 그렇게 새 집에서의 첫출발은 시끄럽게, 몸살과 함께 신고식을 치르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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