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기
호주에 도착해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딘가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연신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Welcome!’이라 적힌 팻말을 든 아주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유심이 필요하지 않냐며 친절히 물어왔고, 우리는 ‘헉! 맞아, 유심 필요해!’하고는 캐리어를 끌고는 따라갔다. 그렇게 어디 건 지도 모르는 유심을 얻어 사용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호주에서 1년 살게 되었다는 말에 어찌나 반갑게 환영을 해주던지. 부드러운 미소의 아주머니께 인사하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오자마자 유심도 해결했어. 우리 진짜 잘 풀린다.”
“호주가 우리 환영 제대로 해주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두 여성의 대화는 참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이 호주에 처음 도착해서, 처음으로 당한 사기이다. 인터넷에 몇 자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을 일인데, 그걸 안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나 믿은 건가 싶기도 하다. 여기가 낯선 곳이라는 감각이 없었나? 아니면 낯선 곳이라 그렇게나 쉽게 웃음과 손짓에 넘어가 버린 건가?
의심해 보자면 끝도 없지만, 그때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아본 것보다 싸네?"
"그러게. 유심은 공항에서 해야 하는 건가?"
그래, 공항 안에 사기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아무튼 경험 없는걸 누구 탓을 하겠는가.
“전화가 안 되는데?” 부동산에 전화를 걸던 서진이 말했다.
“왜지? 와이파이 문젠가? 내 폰으로 해 봐.”
“네 폰도 안 되는데?”
“엥?”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부동산으로부터 집세가 연체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이체가 되지 않은듯했다. 은행 앱을 열어 살펴봐도 딱히 문제는 찾지 못했다. 부동산에 직접 연락해 물어보는 게 빠를 거 같아, 전화를 거는데 전화가 안 된다는 거다. 그것도 둘 다. 전화는 물론, 데이터도 쓸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심이 이상할 거란 생각에 이르기까지도 꽤 걸렸다. 호주 네트워크 문제인가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우리는 조용히 공항에서의 그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왜 있잖아, 시드니 공항에서 만났던 그 아주머니…” 서진이 말을 흐리자
“왜 그랬을까 우리…” 하고 대답했다.
왜 의심하지 못했을까? 굳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한 일 투성이던 시기였다. 새 집도 구해야 했고 전기와 물, 가스, 인터넷 계약 해지도 해야 했으며, 부동산에 계약기간 보다 일찍 나가야 할 거 같다고 사정도 해야 했다. 밀린 연체료는 왜 일어난 일인지 알아봐야 했고 당장 내일 시험도 있었다. 왜 폰까지 말썽이냔 말이다.
인터폰에 못 보던 빨간 불이 들어와 있길래, 처음으로 인터폰 앨범을 보게 됐다. 우스꽝스럽게 찍힌 나의 모습도 있었고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들어오는 친구들의 모습, 늦은 시간 일을 마치고 돌아온 서진의 지친 얼굴 등 다양한 사진 끝으로 오늘 오전, 우리가 학원에 가 있던 시간에 경찰이 우리 집을 호출한 사진이 있었다.
‘경찰이 왜?’
‘설마… 부동산 사기?’
‘집세가 연체되면 경찰이 찾아오는 건가?’ 이 물음이 제일 터무니없고 바보 같긴 하다. 산만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 경찰 아저씨...
"우리 뭐 문제 생긴 거 아냐?"
유심부터 해결하자 싶어, 서비스 센터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길을 잘 모르는데. 데이터가 되지 않는 상태로 길을 찾아야 한단 게 불안했지만, 다행히 서진은 길에 빠삭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와이파이가 연결되기 전까지 아는 말을 총동원해, 벌어진 상황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이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집을 나서기 전 간단히 대본을 적었다.
"우리가 시드니에서 사기를 당했다고 말해?"
"사기 맞나? 그쪽에서 무슨 설명을 해줬는데 우리가 못 알아들은 거면 어쩌지?"
"잠시만, 우리 폰 요금 폭탄 맞았으면 어떡해?"
"폰 요금은 언제 나갔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 늘어놓고 있었다. 언젠가 시티에서 봤던 커다란 서비스 센터로 갔다. 센터의 와이파이가 연결되자마자 번역기와 손짓 발짓 총동원해 상황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제일 중요한 전화번호. 전화번호만 바뀌지 않으면 된다며 사정했다.
“다른 건 전부 괜찮아! 전화번호만 바뀌지 않으면 돼.”
“제발 부탁이야.”
- 새 유심을 기다리는 동안 유심 사기에 대해 찾아봤다. 신기하게도 우리랑 같은 사기를 당한 사람이 있었다!
이럴 수가. 전화번호 유지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새로운 유심으로 새 전화번호를 받아 개통을 해야 한 단다. 어떡하지. 지금까지 본 인스펙션들은 다 어쩌지? 프로필 작성할 때마다 쓴 전화번호였다. 우리가 봤던 인스펙션들 중에서 한 군데라도 연락이 올지도 모를 일인데. 절대 안 된다며, 폰 번호만 살려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가짜 유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짜유심? 그런 것도 있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썼던 것.
여태까지 봤던 집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들이 많았었는데… 전화를 못 받으면 아마 다른 사람한테 넘어갈 거다… 우리가 새 주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느 상상의 아파트를 머릿속에 그려내며, 절망에 빠졌다. 그러다 끝내는 인상이 좋았던 아주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호주에 온 걸 환영한다면서! 환영식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고는 결국 잘 알아보지 않은 우리가 싫어졌다.
그래, 공항 한가운데서 사람 좋은 미소로 유혹해 가짜 유심을 팔 수도 있는 거다.
멋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거다.
이상하리만큼 초연해졌다. 일어날 일이었구나. 해외에서 사기라는 개념이 없던 우리에게 사기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구나. 정말이지 차분해졌다. 꼭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던 것처럼. 큰돈 사기가 아니라, 작은 유심 사기였다는 게 너무 다행스러웠다. 가짜 유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같이 이상한 광고가 날라왔었다. 서진은 지우다 하루가 다 가겠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이제 그 걱정은 덜어질 일이었다.
새로운 번호를 얻고 앞으로 보게 될 부동산 사이트로 들어가 전화번호를 전부 수정했다. 곧 해지해야 하는 유틸리티 빌(전기, 가스, 수도 요금) 프로필 정보도 수정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입해 둔 사이트나 앱에서 수정을 마쳤다. 떳떳한 곳에서 새 전화번호를 얻으니 기뻤다. 연체된 집세도 해결했다. 휴대폰 요금도 폭탄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본 인스펙션도 연락을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어차피 연락 오지 않았을 거야.’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전히 앞으로 봐야 할 집들이 여럿 있었고 아직 살고 있는 집의 계약기간이 남아 있어, 그렇게나 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사기를 당했다는 그 사실이 분했던 거다.
대리점을 빠져나와 막연히 걸었다. 마트로 들어가 생수 한 병을 사고, 또 다른 마트에 들러 캐치볼 세트를 샀다. 30분정도 트램을 타고 멜버른에서 가장 커다란 공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캐치볼을 했다
그러다 참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한국이었더라면 겪기 쉽지 않았을 일 말이다. 애초부터 유심 사기 같은 건 당할 확률이 적었겠지만… 설령 사기를 당했대도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게 어려울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게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이쯤이라 다행이었다.
“액땜인가 봐.”
등이 축축해질 때까지 캐치볼을 하다,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앉아 쉬는데 클로버 무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호주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행운이 오려나봐.” 믿고 싶은 말을 뱉기도 했다.
- 첫 행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