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물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지구 생물의 다채로운 모습은 각자 주어진 환경에 오랫동안 적응한 결과다. 예컨대 개과 동물은 털이 두꺼운 개체와 털이 얇은 개체가 있다. 전 세계에 뻗어 나간 이 개과 동물들은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한대 지역에서는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털이 두꺼운 개체가 생존에 유리했다. 그런데 환경이 바뀌면 입장이 역전된다. 열을 방출해야 하는 열대 지역에서는 털이 얇은 개체가 잘 살아남았다. 이 과정이 오랜 기간 반복되면, 한쪽에서는 털이 두꺼운 개체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털이 얇은 개체만 남는다. 이 이론이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이며, 현재 북극여우와 사막여우의 차이가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기린이 기다란 목을 가지게 된 원인을 설명할 때 먹이를 근거로 들었다. 목이 긴 기린부터 길지 않은 기린까지 다양하게 태어나는데, 기린이 선호하는 먹이가 대체로 높은 곳에 있어 목이 짧은 개체가 도태됐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한 연구에서는 태양이 있는 방향에 머리를 두면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이 목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긴 목의 형태가 바람으로 열을 식히는 데 유리하다는 설도 있다. 다른 연구에서는 목뼈의 구조가 충격을 잘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암컷 기린의 선택을 받기 위해 수컷 기린들이 서로 목을 부딪치며 경쟁했다는, 성 선택 관점에서의 해석을 내놓았다. 기린이나 인간이나 사랑에 눈먼 것은 매한가지일 테다.
기린이 긴 목을 가진 이유에 대해 앞선 연구가 모두 맞을 수도 있고, 혹은 일부만 맞거나, 혹은 전부 틀릴 수도 있다.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환경을 이루는 요소가 단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극여우와 사막여우의 차이에 있어서 평균 기온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평균 기온이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면, 사막에는 모래고양이가 살아가는 반면 북극에는 고양이가 살지 않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환경은 기온, 습도, 강수량, 먹이, 다른 종과의 경쟁력, 습성, 지질 등 개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것이다.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환경은 기후, 지역, 건물, 인간 같은 비교적 큰 규모다. 어릴 때부터 사람은 의식주를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배우지만, 직장인의 월급으로 집을 산다는 건 꿈 같은 말이다. 태어난 지역을 옮기는 것도 상당히 큰일이고, 날씨는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사람은 예기치 못한 구석이 있다. 이처럼 때때로 환경이 개인의 가능성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전부는 아니어도, 사람은 환경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환경’이라는 단어를 ‘공간’으로 대체하면 실마리가 잡힌다.
공간은 환경보다 다소 포괄적인 개념이다. 덕분에 학문마다 학자마다 정의하는 바가 다르다. 이 글에서는 철학적 정의의 일부를 빌리겠다. 사전적으로 공간은 비어 있는 곳을 말한다. 한자를 분해해 보면 빌 공(空) 자에 사이 간(間) 자가 붙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사물과 사물 사이를 보아야 빈 곳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있고 당신이 있어야, 당신과 나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일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곳을 ‘공간’이라 하기보다 굳이 ‘빈 공간’이라 표현하는데, 공간에 항상 무언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린 것이다. 영어로도 공간(Space)과 빈 공간(Void)은 구분된다.
환경이 생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공간은 인간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준다. 예컨대 넓은 카페에 자리 잡을 때, 한 가운데 자리보다 근처에 벽이 있는 자리에 앉는 사람이 많다. 근처에, 특히 바로 뒤에 벽이 있어야 본능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진화에서 찾는다. 숲에 살던 인간 조상에게 뒤가 노출된다는 것은 위험을 의미했다. 시야 바깥에서 접근한 다른 포식자에게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몸의 한 부분이 나무 같은 물체에 가려지면, 경계해야 할 범위가 줄어드니 긴장이 완화됐다. 35만 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호모 사피엔스의 지혜가 지금도 유전자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하나 허투루 사라지는 게 없다.
사적인 자리와 공적인 자리에서 각각 다른 가면을 쓴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공간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한다. 학교에서의 모습, 회사에서의 모습, 도서관에서의 모습, 공원에서의 모습, 집에서의 모습…. 한 명의 사람은 장소에 따라 다른 옷을 입기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사회적으로 차리는 격식 정도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드높은 기둥이 수직선을 강조하는 성당에 들어서면 압도되고, 자연이 만든 색감에 둘러싸인 절에 앉아 있으면 평온해진다. 이는 누군가 강요한 게 아닌, 공간이 가진 힘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재택근무를 경험해 봤거나,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사무실보다 집에서 딴짓을 더 많이 한다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집중하기 위해 카페나 도서관 같은 장소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재택근무가 어려운 이유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집이 가장 편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쉼터와 일터가 품은 공간의 차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구분한다. 그런데 집에서도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일하기 전에 특정 행동을 보인다. 예컨대 복장을 갖춘다든가, 조명을 바꾼다든가, 서재로 간다든가, 잔잔한 음악을 튼다든가 한다. 공간을 의도적으로 바꿈으로써 일과 휴식 사이에 인지적인 차이를 주는 것이다. 만약 집이 원룸이라면 침대와 책상 사이에 파티션을 하나 두는 것도 도움 될지 모른다. 침대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 책상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휴식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다.
공간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뇌과학에서도 다뤄지는 주제다. 바이러스학자 조너스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는데, 그 훌륭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장소는 머리를 싸맨 연구소가 아니라 여행 중 우연히 들른 성당이었다. 소크 박사는 높은 천장 덕분에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른 것 같다며, 연구소를 지을 때 일반적인 사무실보다 천장을 높게 하기도 했다. 후에 천장의 높이와 창의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체감한 과학자들이 해당 주제로 연구를 했다. 그 결과, 창의력이 필요한 일일수록 높은 천장이, 집중이 필요한 일일수록 낮은 천장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공간이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공간을 바꾸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환경에 휘둘리기보다, 공간을 지배함으로써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 장소에만 머물면 정서가 고인다.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나아가 우울하게 만든다. 많은 전문가가 우울감을 덜어내는 행동 중 하나로 산책을 추천한다. 산책, 달리기, 사이클 같은 활동은 내 주변 공간을 끊임없이 바꾼다. 무작위로 바뀌는 공간에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니 기분 전환에 좋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공간을 바꾸는 것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공간에도 한계가 있고 모든 마음이 공간으로 치료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공간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으니 시도해봄직 하다.
사람은 각자 영감을 받거나 힐링하는 장소가 있다. 나에게 그런 장소는 서점이다. 특히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인터넷으로도 편하고 저렴하게 책을 살 수 있는 시대이지만, 게으른 몸을 이끌고 서점에 들르는 이유가 있다. 일단 재밌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서점은 온라인 서점과 다르게 내가 직접 걸어서 물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보통 대형 서점에서는 책 장르별로 구역을 나누어 놓아서, 서점을 크게 한 바퀴 돌면 다양한 테마파크를 체험하는 기분이 든다. 구역마다 품고 있는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다. 가지각색의 책 표지들은 야시장의 간판들 같다. 또한 내가 원하는 구역으로 가려면, 그 구역이 맨 앞에 있지 않은 이상 다른 구역들을 거쳐야 한다. 덕분에 평소에 딱히 관심 없던 주제도 경험하게 되고, 소중한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주제는 서점 내에서도 넓은 구역을 차지한다. 과학책들이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반면 유행에 편승해 비슷한 주제로 몰아치는 책들도 있다. 요즘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 있는지 알게 해준다. 재테크, 블로그, 부업, 주식, 부동산…. 예나 지금이나 돈 얘기는 끝이 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대한민국 도시에서는 힐링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할 때나, 사적인 만남을 가질 때, 사람들이 주로 카페로 향하는 이유도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카페가 아니면 끽해야 술집, 피시방, 노래방 같은 실내 공간이 전부다. 길거리에는 어디를 가나 콧대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공원은 줄어들고 차도는 넓어진다. 인도가 좁아 사람들과 부딪힐 수 있어서 자신만의 템포로 걸을 수가 없다. 가로수나 화단 대신 눈에 들어오는 건 콘크리트뿐이다. 이런 요소들이 모이고 모여 걷는 게 즐겁지 않고 피곤하다. 도시에는 머무를 만한 곳도, 걸어 다닐 만한 곳도 부족하다. 도시라는 공간에 여유가 없으니, 사람에게 여유가 생길 리 만무하다.
개인적으로 외국에서 가장 부러운 공간은 센트럴 파크다. 센트럴 파크의 면적은 3.41킬로미터 제곱으로, 모나코보다 크다. 뉴욕의 빽빽한 빌딩 숲 한 가운데 커다란 진짜 숲이 자리 잡고 있다. 센트럴 파크가 만들어지기 전, 다른 지역처럼 건물이 들어설 뻔했으나 도시공원설계자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가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백 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강하게 설득했다. 센트럴 파크에 연간 2,500만 명이 방문한다는 통계는 옴스테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숲에서 나고 자란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연은 고향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사무실에 화분을 두는 게 업무 효율을 높인다는 연구처럼, 자연물과 인간 정서에 관한 연구는 꾸준히 나온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바이오필리아》를 통해, 인간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이라 주장했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으로, 자연이 무너지면 인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매체에서는 종종 ‘지구가 아프다’ 표현하지만, 사실 고통받는 건 인간이다. 세계 각지에서 극단적인 기후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대한민국에서도 봄이나 가을이 짧아지는 둥 기후변화가 체감되고 있다. 자연을 아끼는 것은 이웃 생물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의 목소리와 달리, 대한민국 도시에는 공원은커녕 가로수나 화단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건축학자 유현준 교수는 공원이 줄어듦으로써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는 양극화라고 한다. 경제적 여유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공원에 비해, 카페는 커피 가격에 따라 모이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디저트에 돈 쓰는 걸 아끼지 않지만, 누군가는 커피 한 잔의 가격이 부담스럽다. 경제적으로 비슷한 이들끼리만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조건 이외에도, 실내 건물은 대체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접하기 힘들다. 예컨대 코인노래방, 바둑기원, 네일아트숍, 이 세 곳은 고객도 인테리어도 다를 것이다. 반면, 경의선 숲길에는 운동하는 사람, 돗자리 위에서 독서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있는 노부부,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사람, 그걸 보고 놀라는 어린아이 등 다양한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실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모습을 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인터넷에서 유독 성별, 세대, 지역 등 집단을 나누고 싸우는 사람이 많다. 커뮤니티, SNS 등 온라인 공간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앞서 예시를 든 실내 공간처럼 자신과 다른 생각을 마주하기 어렵고, 결국 정서가 고이게 된다. 인터넷은 수많은 공간 중 일부일 뿐이다. 세상을 대변하지 않는다. 사람과 세상에 관해 오해를 풀려면, 다양한 공간을 경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