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영 Apr 12. 2022

큰일이다

지각이 아닌 지각

아침에 머리를 안 말리고, 외출을 하는 건 20년이 넘은 오랜 습관이다. 그 습관에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에어팟을 꼽는 습관이 하나 더 해졌다. 에어팟과 함께 한지 2년 후부터 귀 건강이 나빠지는 게 귀에 띄게 느껴져 20년 습관이 될 때쯤 청력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에어팟을 자주 꼽는 습관은 고쳤다. 2년도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기에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저 집에서 10분 거리에 떨어진 역까지만 버티자!라고 작은 규칙부터 만들었다.

     

이 작은 규칙은 횡단보도를 건너편에서 역을 바라볼 때부터 깨질 기미가 보인다. 다리는 분주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오른손은 오후에 헬스장에서 입을 운동복이 들어있는 에코백 안에서 다리보다 더 분주하다. 평소라면 두 걸음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쥐어졌을 에어팟이 오늘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이 가방에 없는 듯하다. 다른 가방을 찾아봐도 없다. 그렇다. 챙겨 나오지 않았다. 횡단보도 끝에서 바로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걸어온 그 거리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처 방법으로 재빨리 집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은 에어팟 때문만은 아니다. 에어팟에 사무실 열쇠와 사무실 서랍 열쇠가 달려 있다. 가방은 안 들고 다녀도 에어팟은 들고 다니니까 그 뭉텅이가 여러모로 내 삶의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그리 중요한 것을 나는 놓고 와버렸다.      


10여분을 다시 걸어 도착한 집, 내 방 책상 위에 분홍색 에어팟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 손으로 기분 좋게 낚아채고, 익숙한 가방에 쑤셔 넣고, 다시 역으로 향했다. 아까 그 횡단보도 앞에서 에어팟을 양쪽 귀에 꽂아 넣고, 바지 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제는 교통 카드를 찾을 차례이다. 또 없다. 신용카드 한 장만 챙겨 다니는 나인데... 바지 뒷 주머니에 없다. 당연히 가방 안에도 없다. 20분 전 고민한 그 장소에서 아까보다는 느리게 대처 방법을 떠올렸다. 오늘따라 현금도 없다. 겨울이 끝나서 더 이상 붕어빵 사 먹을 현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현금도 없다. 근데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다. 지금 집에 들어가면 나는 사무실로 출근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다. 이런 건망증을 가지고 무슨 사업을 하나 싶다. 아니면 그냥 집으로 걸어갔다가 카드 찾고, 택시 타고 출근할까... 습관적인 택시 이용은 사치라고 여겼던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짱구의 끝은 결국 또 집이다. 두고 온 나의 카드는 날 풀린 기념으로 꾸러기처럼 입겠다고 어제 입고 나갔던 멜빵바지에 뒷 주머니가 아닌 앞 주머니에 있었다. 카드를 다시 챙겨 들고, 혹시 몰라 여분의 카드 한 장은 가방에 던져 놓고 집 밖을 다시 나왔다.      


5번째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덥다. 더워. 아직 사무실 근처도 못 갔는데, 5,000보를 걸었다. 오늘 운동 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잘못한 일이기에 화는 나지는 않지만, 짜증은 난다. 이 짜증을 애써 누르기 위해 기적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개인 사업자의 장점 아니겠어? 지각해도 혼 낼 사람도 없고!”     


그러나 그 기적의 논리가 썩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직장인일 때 지각을 해본 적이 없다.(학교다닐 때도 없다.) 지각은커녕 최소 10분 전에 사무실에 착석해야 마음이 편한 그런 성격이었는데, 개인 사업자가 된 이후로는 느긋해져 버렸다. 느긋만 해져야 하는데, 느긋함 뒤에 건망증이 따라왔다는 게 참 큰일이다.    


사무실로 향하는 1호선이 5전 역에 있는 것도 큰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모 아니면 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