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 온갖 꼴을 다 봐."
얼마 전 결혼한 친구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신혼 3달 차인 그 친구는 앞서 이런 말을 했었다.
"집안일을 너무 내가 다 하면 안 되더라고. 시켜야 돼, 시켜야."
나는 슬쩍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집은 분량으로 따지면 남편이 하는 일이 더 많기에 감히 크게 공감하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불쑥 저런 말을 했다. 결혼하면 정말, 온갖 꼴을 다 보는 거야.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이었다. 3개월 차 신혼부부인 친구가 벌써 현실적인 결혼 에피소드를 꺼내는데, 5년 차인 나는 무언가 더 깊은 답을 내놓아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그래서 온갖 꼴을 다 본다고 했는데, 뱉고나서 생각해보니 사실이었다.
'결혼은 현실이다.'
만고의 진리 같은 문장이기에 이에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누군가 결혼은 낭만이라고 하면 혀 차는 소리를 들을 거다. 기혼자들은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아마 말도 얹을 테다. 결혼은 현실이고, 생활이라고.
나와 남편은 올해로 만 서른 하나. 결혼 5년 차. 대학생 때 연애를 시작했으니 연인이 된 지는 10년 차. 그러니까 우리는, 계산이라고는 없던 20대의 풋풋한 사랑에서 현재의 농익은 결혼까지 이어진 사이다. 지금 우리 사이는 어떻냐면,
가장 친한 친구. 가장 편한 사이. 나 스스로에게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을 제외하고는 그게 무엇이든지 다 털어놓는 사이. 그리고 현실 속에서 낭만을 찾는 사이. 우리는 함께 현실을 살아내면서, 그 안의 크고 작은 낭만을 찾는 매일을 지낸다.
그러니까 무작정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로맨틱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비율로 따지면 6:4 정도랄까. 현실이 6, 낭만이 4 정도랄까. 낭만의 정도를 끌어올리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것이 또 결혼이다.
예를 들면, 와인을 한 잔 곁들이며 촛불을 켜놓고 먹는 저녁 식사 같은 건 없다. 물론, 가끔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외식할 때, 혹은 잘 차려입고 기념일에 나가는 나들이에서. 대부분은 집에서 먹는다. 집에서 둘 다 좋아하는 미드를 TV에 크게 틀어놓고 나란히 앉아 먹는다. 오늘 일은 어땠어? 먹다가 대화를 하고, 또 열심히 먹다가 수다를 떤다. 와인에 촛불이 있는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그리 로맨틱한 얘기는 못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문학에 대해 논하는, 서른이 넘었음에도 뭔가 그런 거창한 대화는 어색하고 그저 너 예쁘다, 너 오늘 귀엽다 하며 까르르 웃고 손만 주물럭 거린다.
"우리도 집에서 예쁜 커플 잠옷 입고 있을까?"
외적인 부분도 그렇다. 하루는 미드에 나오는 빈티지 커플 잠옷이 예뻐보여 우리도 시도를 해보자며 상하의 줄무늬 커플 잠옷을 야심차게 구매했지만, 어느새 그 네 개의 상하의는 다 따로 놀고 있었다. 집에서 입는 바지는 답답하다는 이유로 나는 허벅지 위쪽까지 오는 목 늘어난 긴 티셔츠를 주로 입고, 남편은 색이 도저히 조화되지 않는 티와 바지를 아무렇게나 입고 있다. 머리도 앞머리까지 쫙 넘긴 채 기름 뜬 맨얼굴로 소파에 푹 늘어앉은 모습, 현실 그 자체다. 과연, 한 인간의 모든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정하고 숨기지 않는 이상, 같이 살다 보면 다 볼 수밖에 없다. 분명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순간들도 여럿이니.
그러나 분명 낭만은 있다. 없을 리가 없다. 애초에 결혼이라는 것이 뭔가. 좋아하는 사람과 한 집에 붙어 있는 거다. 그런 결혼에 현실만 있을 리가 없다. 내 결혼에 낭만 따위는 없다, 싶어도 찾으면 된다. 찾으면 찾아진다. 현실 속의 낭만.
"너희 둘은 유럽에 사는 것 자체가 낭만적인 것 같아."
나는 종종 친구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맞긴 맞다. 유럽에 사는 것, 달마다 유럽 여행을 가는 것. 핀란드를 가고 체코를 가고 오스트리아에 가는 것. 그것도 낭만이 맞긴 맞는데, 사실 그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환경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일상의 소소한, 아주 조그만 일들이 결혼의 낭만으로 분류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를 테면 요리를 하던 남편이 맥주를 먼저 가져다 주는 일 같은 것이 있겠다.
"맥주 한 잔 하고 있어, 일단. 5분 후면 완성될 거야."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칼칼하게 끓이고 있는 남편이 건네주는 식전 맥주. 소파에서 넷플릭스를 보던 나는 그 순간 사랑을 느낀다. 맥주를 줘서가 아니라(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남편이 나를 너무 잘 안다는 느낌에서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나는 곧장 맥주가 생각난다. 남편이 요리할 때는 늘 그렇다. 남편은 그걸 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지러 가기도 전에 맥주를 준비해 준다. 이건 사랑이다. 그리고 먹는 도중 기존의 병이 거의 다 비워졌을 때, 남편은 묻는다. "맥주 더 줄까?"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맞다. 사랑이고, 낭만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소한 낭만이라 할 것은 침대에서 뒹구는 시간이 있겠다. 거창한 짓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서로의 몸에 다리나 팔을 포개거나 목을 끌어안은 채 말하는 시간. 며칠 전에는 제법 오랜만의 아침이었다. 남편이 일주일 출장을 다녀 온 다음 날의 아침, 오랜만에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난 아침. 공기가 차가워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니 남편 역시 꼼지락 거렸다. "안아줘." 말하니 남편은 한 손으로는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를 감쌌는데 난 그러면 남편 목을 끌어 안는다. 그 날은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예쁘게 생겨가지곤... 연락도 안 하고 말이야."
본인이 출장 갔을 때 먼저 연락도 안 하고 연락도 잘 안 받은 나에 대한 불평을 했다. 불평을 하려면 불평만 할 것이지 굳이 '예쁘게 생겨가지곤' 이라는 말을 붙여 또 사람을 웃긴다.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크게 웃으며 남편을 더 세게 끌어 당겼다. 끌어 당기니 좋은 살 냄새가 나서 킁킁 맡고 얼굴을 목에 파묻었다. 그러고 한참이나 더 뒹굴다가 일어났다. 그런 게 좋다. 며칠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을 감고 기분좋게 떠올리게 되는 것, 나는 그런 일들이 결혼의 낭만이라 여긴다. 하루 중에도 작고 크게 여러 번 웃는 것. 나를 웃게 하는 사람과 매일 함께 붙어 있는 것. 결혼의 낭만이다.
그래서 결혼은 대부분 현실이 맞는데, 그 안에 낭만이 꽉꽉 차 있다. 돈, 경제권, 양가, 집안일 등 피할 수 없는 결혼의 현실들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지만, 이런 낭만들도 피할 수 없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타나버리니 피하려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현실 같은 현실들도, 나중에 보면 결국 다 낭만이 되어있을 거다. 평생의 반려를 만나 매일을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낭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