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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이 무서운 30대 부부

우리가 우리를 잃지 않을 수 있게

by 다롬

우린 결혼을 하고, 신혼 초기 2년은 한국에서 보낸 뒤 21년부터 무작정 해외살이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살 적에는 안정적인 직업, 안정적인 동네, 안정적인 아파트와 편안한 자동차 등등 모든 것이 안정의 울타리 속에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이렇게 쭉 예쁘고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안온한 매일매일을 보내다가 아이도 낳고 키우고, 남편과 백발이 될 때까지 자연스럽게 늙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좋은가.

안정. 익숙한 동네. 월급. 바닥 난방 지글지글 끓는 20평대 아파트, 세단.



평범하고 평범하게 자라 세상의 풍파 한번 겪어보지 못해 뭣도 모르는 20대들이 가지기에는 몹시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너무 차고 넘치는, 너무나 안정적인 울타리.



그래서일까, '너무' 평화로워서였을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정착? 안정?



물론 처음 1년은 좋았다. 틈만 나면 집 근처 대형 쇼핑몰로 나들이를 가던 저녁, 차를 끌고 저 멀리 근교 카페에 가서 노닥거리며 미래 계획을 세우던 한가로운 주말, 방 세 개 있는 아파트에서 방 세 개를 다 놔두고 거실에 얇은 매트리스를 깔아 큰 TV를 틀어놓고 남편과 재잘재잘 수다 떨며 잠들던 밤들.



아, 너무 좋아. 너무 편안해. 결혼은 이런 거였군. 20살에 상경해 그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쭉 7평, 10평 정도의 원룸과 오피스텔에 뚜벅이로 살았던 나에게는 더없이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환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1년 반이 지나고, 2년에 가까워지자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대로 살아도 되나? 이게 맞아? 우리는 그럼, 이렇게 평생을 여기서, 그냥 여기서 살아야 하나. 이렇게...? 나는 못 해 본 게 많은데. 못 가 본 곳도 너무 많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몸집을 키워갔다. 그러다 보니 문득, 이 안온함에 취해 잊고 있었던 최초의 계획이 떠올랐다.



우리, 모험을 하자!


결혼 전에 남편과 했던 다짐과 결의였다.



우린 원래 결혼 후 바로 일을 그만두고 스페인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했었으나 갑작스레 터진 '코로나19'사태로 인해 모든 게 무산되었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신혼생활을 한국에서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그 '모험'이라는 게 완전히 잊혔던 것이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발을 동동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코로나 끝물에 비행기를 타고 날랐다. 용수철 튕기듯 재빠르고, 서두르는 움직임이었다. 몸도 마음도 급했다. 모험, 모험을 해야 해!



2025.10. 이탈리아, 볼로냐 여행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우리네 삶은 곧장 질이 달라졌다. 의, 식, 주 모두 그랬는데, 특히 심한 건 바로, '주'.



한국의 대단지 24평 아파트에서 별안간 '화장실 딸린 3평짜리 방 한 칸'으로 대폭 다운그레이드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해외 이사를 좀좀따리 하면서 몇 개의 10평대 단독 공간을 거쳤다. 녹록지 않았다. 힘들고, 분명한 고생길이다. 우리가 스스로 뛰어든 고생길.



하지만 아주 신나고, 즐겁고, 흥분되는 고생길.



고생길이 조금 적응된다 싶으면 우리는 또 다른 고생길을 찾아 훌쩍 뛰어들었다. 한 곳에 정착하고 안주한다는 게 매우 아쉽고, 몹시 아쉬웠다. 주어진 모든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내 안의 이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아쉬움이라는 것이 거의 사그라들어 형체를 완전히 잃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이제 정착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모험은 흐르고 흘러, 현재는 유럽의 11평 집에서 2년 넘게 지내는 중이다.



작지만 포근한 집, 없는 게 없는 동네, 여기서 키워가는 남편의 커리어와 새로이 찾은 나의 평생의 꿈. 매일매일 서로를 응원하고 돌보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경험과 일. 나름 '균형'이라는 게 잡힌 지금, 21년부터 진행된 해외살이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안정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곳에서 살아봤고,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다. 해외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해보고, 주택 아파트 방 온갖 다양한 공간에서도 한번 살아봤고, 해외에서 맞은 몇 번의 결혼기념일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제 '모험'이나 '방랑'은 조금 잠잠해질 법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착은 내게 두려운 것이다.



93년생인 나와 남편, 30대 중반에 가까워지다 보니 역시 '아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내년 혹은 내후년부터는 피임을 그만두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임신 준비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안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정착과 안정이라는 건 무서웠다. 자신이 없었다.




우리 다음엔 어디로 갈까?
너는 어디로 가고 싶어?



매일 저녁 산책마다 남편과 서로에게 묻는 이 질문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지, 다음 집은 어떤 모양일지, 새로운 동네에는 단골 할 만한 카페나 레스토랑이 있을지, 이런 당연한 고민들이 당연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새로운 고생길에 뛰어드는 것을, 마치 인생의 사명과도 같았던 그 짓을 이제 그만 멈춰야 할 때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대부분 부모가 된 친구들을 보고, '이미 노산'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나와 남편의 고민은 시소를 탔다. 부부로서의 다음 단계와 현재의 자유. 둘 중 하나를 포기할까? 그럼 아이를 낳지 말고 우리 둘만 계속 이렇게 살까. 아니야. 그래도 너랑 나 둘 다 아이를 원하긴 하니까, 아예 포기는 좀 어렵지. 근데 그렇다고 이 모든 걸 다 포기할 순 없잖아. 그럼, 어쩌지?



뭣 하나도 포기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갈등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아이는 원하고, 정착은 무섭고. 정착은 곧 안정이라 하는데, 나는 그 '안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일단 남편이 내 집이고, 남편만 옆에 있다면 내가 사는 이곳이 어디든 다 안정된 포근함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아이는 반드시 한국에서 키울 거야! 했던 고집을 한풀 꺾고, 여행은 매달 가야지! 했던 고집 역시 한풀 꺾고. 그렇게 쓸데없이 꽉 붙들고 있던 아집을 손에서 스르르 놓아주면, 만들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를 잃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꼭 맞는 퍼즐 같은 이 삶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둘에서 셋으로 가족을 늘리는 것을.



해외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기



그러니 이것은 아마 우리의 다음 도전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완전한 자유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정착은 아닌. 우리가 사랑하는 모험자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음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자연의 섭리를 따를 수 있는 선택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도전과 모험'의 축에도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 흔한 유학 한 번 제대로 안 해보고 낯선 이국을 캥거루마냥 훌쩍훌쩍 점프해 다닌 해외 무연고자 쌩한국인 나와 남편에게는 꽤나 험난하고 지난할 과정이 되리라.



지금 살고 있는 유럽의 11평 집에서 그 시작을 할 수도, 또 아예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로 떠나서 새로이 둥지를 틀 수도 있다. 뭐, 그건. 차차 고민해 보도록 하자. 일단 대략적인 방향은 정했으니까.



6주년 결혼기념일을 한 달 앞두고 있는 지금, 새롭게 나타난 신선한 선택지에 우리는 매일 기대와 설렘, 두려움과 걱정으로 다음 목적지를 추리고 있다. 걱정은 되지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언제나 이상한 일들만 해 왔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거야. 죽을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잃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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