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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쾌청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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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Nov 20. 2022

백 년 만의 재회

<쾌청> 2.

찬주는 은원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은원의 핸드폰에는 조립식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를 판매하는 쇼핑몰의 홈페이지가 떠올라 있었다. ‘넨드로이드’라는 것은 애니메이션 피규어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혜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아직도 이런 거 좋아해?”

“작품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성우가 최애라서 사는 거야.”

“너네 또 오덕스러운 얘기 하려고 그러지?”


테이블 너머에서 다른 동창이 놀려대었다. 은원, 혜미, 찬주 셋은 고등학교 시절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자칭타칭 ‘오타쿠 패밀리’로 불리는 삼총사로 똘똘 뭉쳐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은원이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지만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오타쿠 패밀리 삼총사로 잘 지내 왔을지도 몰랐다. 


“우리 고1 여름방학 때 코믹월드 나간다고 혜미네 집에서 밤새 옷 만들었던 날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지. 혜미 어머니께서 야식까지 든든히 챙겨 주셨잖아.”


또 다른 동창이 셋의 추억담에 슬쩍 끼어들었다. 


“너희들 그 코믹인지 뭔지 한창 놀러 다닐 때 나도 한 번 구경한다고 따라갔던 거, 기억나? 거기가 어디였더라.......”

“여의도!”

“그랬나? 여하튼 그때 은원이가 귀신처럼 새하얀 가발을 쓰고 코스프레를 했는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사진 찍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 거 있지. 사진사 수십 명이 애 하나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대포처럼 큰 카메라로 막 사진을 찍어대는 거야. 무슨 아이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혜미는 뒤로 넘어갈 기세로 깔깔거렸고 찬주는 민망한 웃음을 삼켰다. 은원은 말없이 잔에 소주를 따랐다. 찬주가 혜미와 은원에게 물었다.


“그때 우리 여의도에서 했던 코스프레가 어떤 코스프레였더라?”


은원이 단숨에 비운 소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창세기전 3탄 파트 2.”

“맞아. 창세기전!”


잊을 수 없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이제는 자취를 감춘 여의도 중소기업 박람회장에서 열렸던 코믹월드 행사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찬주와 은원과 혜미는 유명 포털사이트의 애니메이션 동호회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셋은 동호회에서 친해진 언니 오빠들과 함께 코믹월드 행사에 나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국산 롤 플레잉 게임 시리즈 ‘창세기전’ 3편의 캐릭터 코스프레를 했다. 그 시절 코스프레 판에서 명성을 떨쳤던 미녀 코스플레이어들이 모두 한팀으로 출전해 화제를 일으켰다. 그중 제일 인기를 끌었던 코스플레이어는 ‘날개’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던 은원이었다. 은원은 창세기전 3편의 주인공 ‘베라모드’로 분장했는데 그 자태가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했는지 코믹월드 행사가 끝나고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사진 중 태반이 은원의 독사진이었다. 

혜미는 신이 났는지 핸드폰으로 싸이월드 어플을 불러들였다. 구경하던 찬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싸이월드 망하지 않았어?”

“뉴스 못 봤어? 얼마 전에 부활했잖아. 사진첩도 그대로 남아 있어. 흑역사 저장소라고나 할까.”


먼지 쌓인 서랍장 같은 혜미의 싸이월드 홈에는 십여 년 전 싸이월드가 지금의 인스타그램과 같은 위상을 지녔던 그 때 그 시절 열심히 찍어 올렸던 사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저해상도 사진 속 자신과 친구들의 어린 태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자 부끄러움보다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앞서 가슴이 뻐근해졌다. 찬주는 산타클로스처럼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혜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이거 너지? ‘조안 카트라이트’.”

“맞아. 이 드레스 손바느질로 만들다 죽을 뻔했잖아.”


찬주는 해묵은 사진들을 그리움 어린 시선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참 열심히도 놀았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가며 밤새 코스프레 의상을 만들었던 추억,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들의 그림을 그려 은원이네 집에 있던 컬러 프린터로 뽑아 코팅해 열쇠고리나 책갈피를 만들어 코믹월드 판매전에서 팔았던 추억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왔다.  


“이 언니들은 지금 뭐 하고 살까?”


찬주는 수영복을 방불케 하는 과감한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한 코스플레이어들의 사진을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혜미는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시집가서 애 낳고 잘 살겠지.”

“성공한 덕후 된 언니들도 있을 거야.”

“그러고 보면 은원이야말로 성덕 아닌가?” 


찬주와 혜미는 소주를 마시는 은원을 바라보았다. ‘성공한 덕후’란 은원 같은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학창시절과 변함없이 취미생활을 만끽하고 살아서일까, 은원의 앳된 얼굴은 영원히 늙지 않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은원은 워낙 피부가 고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찬주와 혜미가 여드름 자국을 감추려고 엄마 화장대에서 슬쩍한 트윈케이크를 열심히 덧바르는 동안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은원은 둘의 뒤치다꺼리를 도와주고는 했다.


“은원이는 진짜 아이돌 같네.”


찬주는 흰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에 앉아 찍은 은원의 독사진을 보며 새삼스레 감탄했다. 열여덟 살 은원은 어른의 눈으로 보면 조잡스럽기 그지없는 코스프레 의상도 아름답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뼈대가 가느다란 몸매와 긴 팔다리, 인형처럼 자그마한 얼굴. 은원이라면 정말로 연예인이 되었어도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사진 유명한 사람이 찍어 준 거 아냐?”


찬주의 질문에 혜미가 대답했다.


“맞아. 여기 찍어 준 사람 홈페이지 주소도 쓰여 있네.”


은원을 찍은 사진 파일 귀퉁이에는 사진사가 운영하는 개인 홈페이지 주소와 함께 ‘Studio HD’라는 영어 문장이 촌스러운 폰트로 적혀 있었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불현듯 해묵은 기억의 편린이 찬주의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그래, 기억난다. 이 스튜디오 운영자 사진 잘 찍기로 유명했지. 얼굴도 제법 멀끔해서는.......”  


은원이 갑작스레 찬주의 말허리를 잘랐다.


“우리 연태고량주 마실래? 내가 쏠게.”


찬주는 시계를 확인했다. 정신없이 떠들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가까워졌다. 다른 동창들은 하나둘 일어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지만 혜미는 신이 나서 의자를 은원 곁에 바짝 끌어다 앉았고 점원도 잽싸게 고량주 병과 술잔을 가져다 놓았다. 에라 모르겠다, 찬주는 집어 들었던 클러치백을 도로 내려놓았다.   


“너희들 혹시 ‘냄새’ 기억나?”


새로 주문한 양장피를 열심히 먹던 혜미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찬주가 되물었다. 


“냄새라니, 무슨 냄새?”

“그 시절 코스프레 사진 찍던 사람 중 닉네임이 ‘냄새’였던 사진가가 문득 기억나서.”


단무지 한 조각을 오 분에 걸쳐 나누어 먹던 은원이 대답했다.


“냄새가 아니라 ‘향기’였어.”


혜미는 젓가락으로 앞접시를 두들기며 깔깔 웃었다.


“맞아. 냄새가 아니라 향기! 나는 왜 냄새라고 기억하고 있지?”

“코스프레 하던 여자애들끼리는 그 사람을 냄새라고 불러서 그럴걸.”


혜미는 곰곰이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다. 술기운에 무디어진 사고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혜미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기억났어. 냄새! 그 변태. 짧은 치마 입은 여자 코스플레이어만 보였다 하면 냅다 달려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사진 찍는 인간이었잖아? 애들 팬티 도촬하려고.”


찬주도 지지 않고 옛 기억을 끌어올렸다.


“맞아. 나도 한 번 냄새한테 사진 찍힌 적 있잖아. 그땐 그런 속셈인 줄 몰랐는데 소문 들은 다음부터는 꼭 검정 속바지를 챙겨 입고 코스프레 하러 나갔지. 멍청한 놈이 그것도 모르고 평소대로 바닥에 벌렁 드러눕더니 표정이 싹 굳더라.” 

“여고생 팬티가 안 보여서 실망했나 보지?”


셋은 망아지처럼 발을 구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타쿠 패밀리 셋만 남으니 판도라의 상자가 활짝 열렸다. 남다른 취미에 목숨 걸던 이상하고 우스운 사람들과 그게 이상하고 우스운지도 모르고 열중했던 우리들.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왔다. 


“배 아파 죽겠다. 이런 얘길 어디 가서 할 수 있겠어.”

“우리 언제 또 셋이 따로 모여서 그 시절 얘기할까?”

“좋아. 다음 주말 어때? 우리 집에서 밤새워 마시고 놀자.” 


가게 사장이 문 닫을 시간이라는 눈치를 주었다. 셋은 엄벙덤벙 자리를 뜰 준비를 시작했다.


“너이들 다시 마나서 너모 조아.”


은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혜미도 맛이 가기 직전이었다. 정신 차리고 애들 집에 보내야지. 찬주는 정신을 다잡으며 일어섰다.   


“나 데리 부러야 대.”


은원은 핸드폰을 찾아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다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찬주는 부랴부랴 천지사방으로 흩어진 은원의 물건들을 주워들었다. 값비싼 명품 핸드백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 뿐이었다. 애니메이션 ‘건담’의 캐릭터가 그려진 화장품 파우치와 뒷면에 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PSP(Playstation portable) 한정판. 이런 오타쿠틱한 물건들의 정체를 일일이 알아보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전직 오타쿠네. 찬주가 속으로 웃으며 은원의 가방을 싸주는 동안 혜미는 테이블에 엎드려 우렁찬 코골이를 시작했다. 


“문 닫을 시간이에요.”


사장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 찬주는 재빨리 핸드폰으로 대리운전 어플을 다운받아 대리 기사를 호출했다. 은원이도 참, 차 끌고 왔다고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원망해 봤자 은원은 고전 만화 ‘내일의 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의자에 걸터앉아 졸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 기사가 근처에 도착했다. 찬주는 한쪽 팔로 은원을, 다른 팔로는 혜미를 부축한 채 힘겹게 가게를 나섰다. 술값은 어느 틈엔가 은원이 계산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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