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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쾌청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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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Nov 20. 2022

남의 결혼식

<쾌청> 1.


강남대로는 거대한 주차장 형국이었다. 찬주는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을 30분 앞두고 택시 뒷좌석에 갇혀 있었다. 차가 막혀서 늦을 것 같다고 눈물을 흩뿌리며 번지점프를 하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동창 단톡방에 전송했지만 아무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들 신부 대기실에서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느라 한창 정신이 없을 터였다. 


“......뱅뱅사거리에서 일어난 승용차 추돌사고 여파로 논현역까지 속도 내기 어렵습니다.”


라디오에서 불난 데 기름 붓는 말이 흘러나왔다. 택시 운전사는 핸들 위에 양팔을 걸친 채 젠장, 하며 혀를 찼다. 찬주는 순식간에 불어나는 요금 미터기의 숫자를 흘끔대며 지도 어플의 새로 고침 아이콘만 연타했다. 이렇게 밀릴 줄 알았으면 그냥 전철 탈 걸, 날려 먹은 택시비를 축의금에서 돌려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낮 최고 기온은 영상 20도입니다.”


운전사는 라디오를 다른 채널로 돌렸다. 날씨도 좋은데 그냥 내려서 걷는 편이 빠를지도 모르겠다.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지도 어플에 뜬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수영복처럼 온몸을 조이는 하객 원피스 차림으로 뛰어가기에는 벅차 보였다. 인고의 시간 끝에 택시는 내려서 뛰어볼만 한 사정거리 안으로 진입했다. 택시에서 내린 찬주는 클러치백을 바통처럼 움켜쥐고 강남역 언덕배기를 내달렸다. 길들지 않은 하이힐 뒷굽이 발을 딛을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렸다.

찬주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동창들은 신부 측 하객석에 나란히 모여앉아 있었다. 오랜 단짝 혜미가 어서 와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다리를 절뚝이며 빈자리에 끼어 앉자마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양가 어머니들이 단상에 올라 거대한 화촉에 불을 밝히고 현악 사중주 결혼행진곡에 맞추어 신랑신부가 버진로드 위에 올라섰다. 하객들은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인생 최고의 날을 맞이한 우리 신랑 신부님께 힘찬 축복의 박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찬주는 사회자가 시키는 대로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다른 애들은 축의금 얼마씩 넣었을까? 이따 밥 먹으면서 슬쩍 물어봐야지.     


“역시 공대남이 답인가.”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는 동창이 훈제 연어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중얼거렸다. 예식을 마치고 내려온 연회장은 음식의 맛과 접객 서비스 모두 고급 뷔페 못지않았다. 오늘의 신부 수진은 연애 일 년 차에 결혼했다. 결혼식장은 새신랑이 다니는 대기업의 강남 지사에 딸린 임직원 전용 웨딩홀이었다. 강남에서 이 정도 수준의 예식장을 잡으려면 모르긴 몰라도 돈이 제법 들 터였다. 역시 대기업이다. 찬주는 해마다 부실해져만 가는 회사의 복지 정책을 떠올리며 부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진이 신랑 같은 공대남이 최고야. 수입 확실하지, 여자 말 잘 듣지. 더 바랄 게 있어?”


“그래도 난 키 작은 남자는 싫어.”


“왜? 신랑 턱시도 입혀 놓으니까 나름 귀엽던데.”


“원래 남자는 수트 발이야.”

 

일곱 명의 여자들이 왁자지껄 말을 쏟아냈다. 모두 같은 여고 출신 동기동창들이었다. 개중에는 졸업하고 십수 년 만에 재회한 사이도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단짝들도 있다. 오늘의 새신부 수진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일자리 소개를 받을 만큼 사교성이 좋았다. 그런 수진을 매개로 오랜만에 동창 여럿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삼십 대 중반을 넘긴 사회인들인지라 데면데면하게 굴 것도 없이 해묵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수진은 자리에 모인 동창 중 두 번째로 탄생한 유부녀였다. 유부녀 1호는 첫 남친이자 캠퍼스 커플이었던 신랑과 사고를 치는 바람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벌써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머지는 결혼 예정이 없는 비혼들이었다. 


“수진이 신행은 어디로 간대?”


아이 엄마가 유아용 의자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아기의 입에 방울토마토를 억지로 밀어 넣으며 찬주에게 물었다. 아이 엄마 친구는 맏이와 둘째는 친정엄마에게 맡겼지만 20개월짜리 막내까지 떠넘기기에는 눈치가 보여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나왔다며,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구구절절 변명 같은 해명을 풀어놓았다. 


“발리로 간대.”


찬주가 대답해 주자 아이 엄마 친구는 흘러간 추억을 더듬는 노인처럼 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신행 발리였는데......발리, 좋지.”


아기가 반쯤 씹다 만 방울토마토를 내뱉으며 구급차 사이렌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여섯 명의 동창들은 동시에 말을 멈추고 절규하는 아기와 엄마를 쳐다보았다. 아이 엄마 친구는 아기를 의자에서 꺼내 들고 동시에 바닥에 내려놓은 기저귀 가방을 어깨에 들쳐메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번개 같은 동작이었다.


“애 키우는 거 진짜 힘들겠다.”


“난 죽어도 못 낳을 듯.”


친구들은 아이 엄마 친구가 자리 뜨기만 기다렸다는 듯 참고 있던 말을 쏟아냈다. 찬주는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아이 엄마 친구의 접시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기는 귀엽지만 저렇게 생생한 육아의 현장을 목격하면 아이 낳을 엄두가 들지 않는다. 결혼은 커녕 만나는 남자도 없는 판에 애를 낳느니 마느니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꼴이 웃기지만.

‘넌 결혼하자는 남자도 없어?’ 친구 결혼식 간다는 말에 어김없이 터져 나온 엄마의 잔소리가 불쑥 떠오르며 입맛이 싹 가셨다. 찬주는 집어 들었던 모닝빵을 도로 내려놓았다. 20대 때는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지 말라며 두 눈을 부릅뜨던 엄마는 딸이 서른을 넘기자 재활용센터에 내놓은 중고품 취급을 하더니 30대 중반에 접어드니까 급기야 아무 남자나 쫓아가서 애부터 만들어 오라는 황당한 폭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너희들은 축의금 얼마씩 냈어?”


궁금했지만 대놓고 물어보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질문을 옆에 앉은 혜미가 대신 꺼내 주었다. 혜미는 이럴 때 참 고맙다.


“나는 십만 원.”


“나도.”


친구들의 대답을 듣고 찬주는 속으로 안도했다. 혼자 오만 원 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아침에 축의금을 뽑으러 들른 동네 은행 ATM 기계 앞에서 잠깐 고민했더랬다. ‘베프’로 분류되는 단짝 친구는 당연히 십만 원, 회사 동료는 삼만 원에서 오만 원이라는, 누가 무슨 권리로 정했는지 알 길 없는 축의금 불문율이야 알고 있지만 수진은 베프로 분류하기에는 조금 어정쩡한 관계에 놓인 친구라는 게 문제였다. 고민하다가 다른 동창들은 어쩐지 십만 원씩 낼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오만 원권 두 장을 봉투에 넣었는데 잘한 일이었다.  


“축의금 내다 파산하겠어. 나는 어차피 돌려받을 일도 없는데 말야.”


혜미는 냅킨으로 입술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닦으며 큰 소리로 불평했다. 찬주야말로 이번 달에만 세 번째 결혼식이고 다음 달에는 회사 후임의 결혼식이 잡혀 있었다. 가을은 결혼에 미친 계절이었다. 아니, 어차피 결혼할 사람들은 어느 계절이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가리지 않고 결혼식을 올린다. 비혼들은 돌려받을 기약도 없는 돈을 1년 내내 기혼자들에게 상납하는 저금통 신세라는 뜻이다. 그래도 단짝인 혜미가 결혼한다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십만 원을 낼 거라고 찬주는 진심으로 생각했지만 혜미는 20대 시절부터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다. 


“은원이는 진짜 오랜만이다.”


찬주는 기분을 전환해 보려고 말을 돌렸다. 찬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원은 스마트폰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혜미가 어깨를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 아이 같은 표정으로 찬주를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송아지처럼 커다란 눈 덕분에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한층 더 작아 보였다. 

떼 지어 음식을 퍼담으러 가던 신랑 측 하객들이 걸음을 늦추며 이쪽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은원을 보는 것이 뻔했다. 신랑신부와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하객석의 어르신들이 은원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학창시절부터 은원은 동네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축제 날마다 은원을 구경하겠다고 옆 동네 남고생들이 찾아오고 어떤 녀석은 어설픈 꽃다발까지 들고 와 고백을 하기도 했다.


“다 먹었으면 근처에서 차 한 잔 하고 가자.”


동창들은 외투와 핸드백을 챙겨 들며 일어났다. 아이 엄마는 가까스로 잠든 아기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고 싱글들끼리 디저트 카페로 장소를 옮겼다. 거기서도 얼마나 수다를 열심히 떨었는지 내친김에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했다. 여자들은 SNS에서 검색해 찾아낸 중국집에서 찹쌀 탕수육과 깐풍새우를 시켜 놓고 맥주를 마셨다. 


“은원이 잘 마신다.”


찬주는 건배한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맥주 한 병을 말끔히 비워내는 은원을 보며 감탄했다. 혜미가 제안했다.  


“우리 쏘맥 마실래? 내가 말아줄게.” 


은원은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야말로 술고래 중의 술고래였다. 혜미는 베테랑 영업사원 못지않은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소맥을 제조해 은원과 찬주 앞에 한 잔씩 놓아 주었다. 


“아까부터 자꾸 핸드폰 보던데, 뭐 재미난 거라도 있어?”


찬주가 묻자 은원은 거리낌 없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답했다. 


“오늘부터 넨드로이드 선예약 시작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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