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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미응 Dec 19. 2023

가족제도 낯설게 보기, 김지혜 <가족각본>

2019 화제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교수님이 <가족각본>이라는 책으로 돌아오셨다. 가슴 뛰는 제목에서 유추되듯 가족 제도에 대한 고찰과 비판을 담았으며,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가 속한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21세기도 사반세기에 가까워지는 요즈음, 가족 내 지위가 성별로 좌우되는 현상은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가족각본의 고착화는 인류 문화에 생각보다 깊이 새겨져 있다.

사진: 한겨레 류우종 기자

퀴어혐오세력이 자주 쓰는 슬로건이 있다. "며느리가 남자라니" 며느리는 여자여야 한다는 가족각본에 근거한 여덟자인데, 이는 제법 강력해서 퀴어혐오자가 아니더라도 무슨 뜻인지 즉각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며느리가 남자여야 하는가? '원래 그렇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말고 무슨 이유가 더 있는가?


부부, 고부에 쓰이는 '며느리 부婦’자는 여자 여女+빗자루 추帚, 즉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청소하는 여자를 형상화한 한자이다. 이처럼 며느리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인상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인상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며느리는 사실 굉장히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시부모와 남편 친척을 섬기고 살림을 꾸리면서 행사를 주관해야 한다. 회사로 치면 팀장, 대리, 중간관리자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고달픈 포지션이다.


이처럼 며느리는 역할로서의 호칭이다. 사위, 남편,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지위는 어째서 성별로만 결정되는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능동적이어야 했던 며느리라는 역할은 왜 여성이어야만 했을까. 정녕 아직도 '가족 내 지위가 성별로 좌우되는 현상'은 구시대의 유물인가?



출생률과 가족주의

동성결혼 왜 안되는데?


동성혼 반대자들에게도 나름의 근거가 있다. 그중 전형적인 패턴으로 1. 출산율이 있는데, 재밌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무려 동성결혼과 출생률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동성과 결혼을 못하면 갑자기 이성을 만나 임출육을 결심하기라도 하나? 오히려 동성결혼을 법제화하고 그 자녀(입양 혹은 정자기증을 통한 임신)에게 적절한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저출생대책에 힘이 되지 않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정상가족체제 유지를 위한 대책 중 하나는 탈-정상가족의 형태에서 나온다.)


레퍼토리 2. “엄마/아빠만 둘인 가정에서 자녀가 정서적으로 잘 자랄 수 있겠어?”

한부모 가정까지 한꺼번에 손가락질하는 훌륭한 혐오의 예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성커플에는 적용되지 않는 아주 엄중한 이중잣대다. 보통 결혼하고 자녀를 가질 때 그들에게 자격이 있는지-정서적으로 더 안전한지- 묻지 않는다. 게다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결혼한다고 해서 자녀를 가진다는 보장도 없다. '딩크' 현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동성커플에서는 그런 경우를 상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고보니 1번 주장과 정반대 입장이다. 신기하다.)


저출생은 구조적인 문제이고, 어떤 형태의 가족이든 자녀를 갖지 않는 결정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저출생 대책으로 몇백만원 지원 같은 단기적인 비용 지출을 내놓는 일이야말로 비난할 일이다. 환경오염이나 사회적 불균형이 거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분야야말로 오랜 시간 많은 투자가 필요한 곳이다. 단기적 ’퍼주기‘는 본인 임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포퓰리즘이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출생률이 비례한다고 둘에만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20세기, 흔히 남성이 승진과 임금에서 유리한 이유로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기 때문에‘라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남성 혼자 집안을 책임질 수 있는 가구는 절반을 넘지 않았고(1911년 인구조사) 근대의 ’전업주부‘라는 개념도 ’가족문화의 귀족화‘(장경섭)에 의한 허상에 가까웠다. 완벽한 성별 분업이 가능한(=남성의 소득만으로 생계가 이어지는) 가구는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메리 브린턴과 이동주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구조—즉 전통적 성역할을 고수하며 +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우호적인 국가에서 출생률이 낮다. 즉 여성의 노동이 출생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일하는데도 여성에게 전통적 성역할(가사 및 육아노동)을 부과하는 것이 문제다.


즉, 가족구조의 해체가 오히려 저출생을 해결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은 혼외출생을 일종의 죄악으로 여긴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합계출산율이 한국보다 현저히 높은데도 동성결혼 혹은 비혼커플 결합제도를 인정했으며 혼외출생률도 높다. 예전에는 결혼이 내 집, 내 둥지 마련이었으나 이제는 결혼 자체가 사회적 기반의 안정을 의미하지는 않는 시대인 것이다.



성 인식과 사회적 병폐


최근 몇 년 간 아동성교육도서를 대상으로 기독/보수학부모단체의 거센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2019년 여성가족부의 나다움어린이책 선정사업이 시초였다. 해외에서 유명한 상을 받기까지 한 성교육 책이 한국에만 들어오면 ‘금서’로 탈바꿈한다. 왜 그것이 ‘야한’ 것이고 교육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며 ‘낯뜨거운’ 이야기인가? SNS의 스낵 포르노를 먼저 접하는 것과 아동 성교육 도서를 먼저 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성 인식을 왜곡할까? 해당 도서를 반대하는 가정에서는 적절한 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교육은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곡된 성인식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끔찍하게도)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성에 대해 터놓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성을 터부하시는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움츠러들고 음지에서 성적 학대가 횡행한다. 왜 해마다 성범죄 신고 건수가 올라갈까? ‘쉬쉬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캠페인이 전사회적으로 일어나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다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가족 안에서 여성의 성은 온 가족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져왔다. 여성의 ‘순결’은 지참금과 교환하는 귀중한 가치였고, 이를 가족의 명예라는 이름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이 현시점에서 낡은 유물로 보이나,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의 성을 터부시하는 인식은 남아 있다. 다른 성에 비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적 비하 욕설이 현저히 많이 존재하는 것, ’문란한’, ‘몸을 함부로 굴리는’ (혹은 그런 소문이 도는) 여성에 대한 낙인, 가족 내 여성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감추어진다. 동시에, “누군가는 성적으로 비난받기 쉬운 여성의 취약성을 이용해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세계와 한국의 변화


2011년 대법원은 미성년 자녀가 있을 경우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불허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그쪽이 아동을 혼란과 차별에서 보호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 “차별하는 쪽의 편견과 몰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법률적 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를 부담”해야한다는 판결로 성별정정을 인정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미성년 자녀의 복리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정상가족 바깥의 가족형태가 사회적 법리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그들을 정상가족에 편입하는 길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타협되는 점은 씁쓸하나 10년만에 실로 커다란 한 발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가족의 의미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1인가구나 이혼가정을 ‘위기’, ‘해체’, ‘병리‘로 보는 시각으로 정상가족을 수호할 수 없다면, 이제는 대안적 제도를 고안할 때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이토록 많은 국가가 동성혼과 생활동반자법등으로 새로운 가족형태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오로지 한국만 과거로 회귀하려 드는 것 같다. 2023년 한국에서도 생활동반자법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집단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이어져 정치권에서도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국민적 합의' 운운은 일종의 방패막이다. 가족형태는 국가 사회보장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가족이 사회복지의 안전망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계층이 세습되고 가족을 꾸릴 '자격'은 개인의 자본으로 결정된다. 그러면 가족이 없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가족 해체가 급속화되는 사회, 1인가구가 아래로 떨어질 때 현재 사회 안전망은 얼마나 오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마피아 게임


가족각본의 대명사,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생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조선 후기와 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일본의 ’양처현모‘ 이념이 들어오면서 확산된 것이었다. 심지어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롤모델로서 발굴된 것도 그 시기였다. (홍양희 "현모양처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상호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파생물") 이는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도 강조되었는데, 천황을 아버지로 모시는 일본의 권위주의적 인식과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새삼 선뜩하다.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양처현모 개념이 부상했던 까닭은 전쟁시기 국민을 복종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이처럼 '현명한 어머니'와 '좋은 아내'라는 확고한 가족 각본이 숭상될수록, 즉 가족주의가 중시되는 사회일수록 국가의 책임 회피가 용이하다. (장경섭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즉, 공공부문에서는 사회보장에 드는 비용을 아끼고, 가족 내에서는 성별 분업화로 남성에게 과중한 노동을, 여성에게는 육아를 맡김으로써 여성의 사회진출을 저해하고 차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회적으로 성별 상관 없이 가사에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줄이고 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성별로 역할을 가르고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도입하는가?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 시 발생할 수많은 제도적 미흡함과 문제점을 차치하고서도, 과연 "초국가적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정책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마피아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다룬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일을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시점. 그 중 하나는 상식의 바깥에 위치한 이들을 인지할 때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의 모든 당연함 바깥에는 소외된 사람이 있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곁에도 그런 인구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가족 각본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볼 때이다.



본문은 책내용과 개인의견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글이 흥미로우셨다면 꼭 <가족 각본>을 읽어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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