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학 운동권은 공권력의 감시 대상이었다. 나는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학업을 뒤로하고 학생운동에 전념하던 나는 시위하다가 연행도 많이 되고, 경찰서의 유치장 신세도 여러 번 졌다.
당시 경찰은 역이나 터미널 등 사람이 붐비는 곳에 잠복해 있다가, 운동권처럼 보이는(?) 대학생을 색출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귀경해 서울역에 도착한 어느 날이었다. 역을 나서는데 사복 경찰 둘이 나를 제지하고 불시 검문을 했다. 마르크스나 레닌 같은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책을 갖고만 있어도 죄가 되는 시절이었다. 그날따라 내 가방 안에 ‘러시아 혁명사’나 ‘마르크스 유물론’ 같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이 여러 권 있었다. 내 가방을 뒤지던 경찰의 표정에는 횡재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나를 연행했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 소지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나는 꼼짝없이 두 경찰에 의해 양옆에 팔이 붙들린 채 서울역 맞은편 남대문 경찰서로 끌려 들어갔다.
나는 ‘대공과’라는 명패가 보이는 복도를 지나, 별도의 작은 조사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 형사와 내가 마주 앉았다. 나는 겉으로 태연한 척했으나, 속으로는 겁이 났다. 당시 익히 들어서 머리에 각인된 고문의 공포도 스쳤다. 형사는 이것저것 나의 인적 사항을 물었다. 그리고 백지와 볼펜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 종이에 지금 활동하는 학내 서클과 그 서클의 회원 명단을 적으라고 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작성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자리를 비웠다. 등골이 싸했다. 나의 진술을 빌미로, 학내 운동권 세력의 조직도를 꾸며, 일망타진해 보겠다는 형사의 계획이 느껴졌다.
나는 적당히 둘러댈 묘안을 고심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와서 의외의 말을 툭 던졌다.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어안이 벙벙했지만 내심 안도하며 경찰서를 나섰다. 그런데 경찰서 앞에 부모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가 말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풀려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고향 친구 덕이었다. 경찰이었던 그는 내 소식을 듣자 곧바로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버지는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선처를 부탁했다. 그렇다. 어쩌면 요즘 말하는 아빠 찬스였던 셈이다. 아빠 찬스가 없었다면 나는 전과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요즘 말하는 아빠 찬스는 부의 세습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경우는 가난한 부모가 자식의 안위를 지키려고 쓴, 실낱같은 인맥이었다.
이날 부모님은 내가 대학에서 성실히 공부만 하는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아챘다. 연일 TV 뉴스에 등장하던, 시위하는 대학생 가운데 당신의 아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나는 부모님이 알던 자식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나를 변호하려고 시국 얘기를 꺼냈다. 내 말에 부모님이 설득될 리가 없었다. 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의 침묵이 집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짧은 대화와 긴 침묵이 이어진 뒤, 어머니의 몸조심하라는 당부로 자리를 파했다. 그날 밤, 모두가 잠 못 이뤘다. 부모님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인 밤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를 구해주었던 아버지 친구는 정년퇴직 후 시인이 되었다. 그가 내게 보내준 시집을 펼치며, 나는 40년 경찰의 삶과 시의 간극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