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눈이 녹고 봄이 다가오는 무렵에 사랑은 시작되었다.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일을 핑계로 만남을 지속하는 은수와 상우가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흔히 같은 곳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에게는 같은 소리를 듣는 것이 그러했다. 가만히 서서, 혹은 앉아서 갈대밭의 바람소리를, 눈이 오는 소리를,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고요함 속에서 피어난 낭만은 사랑이 되었다.
은수는 이미 한 번 결혼에 실패한 여자다. 이후에 그녀는 얽매인 사랑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라면처럼 쉽게 만들고 빠르게 끝낼 수 있는, 부담이 없는 사랑만 하기로 마음먹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우는 달랐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이 남자는 은수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마치 과거의 소리를 녹음 해 먼 훗날에도 똑같이 들을 수 있듯이. 하지만 녹음테이프는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재생되지 않는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한 것을 왜 몰랐을까. 집에 인사를 가자는 상우의 말에 은수는 “나 김치 못 담가” 하고 말한다. 매년 담가야 하는 김치처럼 평생 지속해야 할 결혼 생활이 은수에게는 굉장한 속박이다.
행복했던 봄이 끝나고 여름 무렵에 두 사람은 끊임없이 다투기 시작한다. 라면이나 끓이라는 은수의 말에 상우는 홧김에 내가 라면으로 보여? 라고 말하지만, 슬프게도 사실이다. 은수에게 상우는 라면같은 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편 상우의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를 역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상우는 할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났던 남자를 어떻게 오랜 시간 그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할머니를 예뻐했으면서 왜 바람을 피웠냐는 상우의 말에 고모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단다”라고 대답한다. 그냥 넘어갔을 이야기를 아마 상우는 이별 후에 다시 떠올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상우의 원망 섞인 물음에 대한 은수의 무언의 대답은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다. 지독한 이별 후 상우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고, 모든 사랑은 봄날처럼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을 배신한 그대가 밉지만 평생 그리워하게 된다는 사실 또한.
이별을 부정하던 여름이 지나고, 마침내 사랑이 끝나고, 끝났음을 겨우 받아들인 후 겨울이 왔다. 그리고 또 다시 봄이 왔다. 은수와 상우는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다시 만난다. 은수는 작은 화분을 화해처럼 건네지만, 상우는 다시 힘겹게 돌려준다. 그에게는 깊고 힘든 사랑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다시 오듯, 지나간 사랑은 그들의 일부분으로 남았다. 은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피를 멈추게 하고, 상우는 녹음된 추억의 소리들을 듣는다. 모든 것이 흐릿한 영화의 이미지처럼, 지나가버린 사랑도 흐릿하다. 하지만 강렬했던 사랑의 기억은 선명하지는 않아도 분명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