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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e Jul 06. 2020

나는 네 뻔뻔함이 좋았다.

내일, 면접을 앞둔 너에게.

3개월 전, 그날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날씨가 어땠는지, 무슨 옷을 입었었는지,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났는지 조차도. 그날 내 모든 감각은 남자 친구의 '면접 합격자 발표'에 쏠려 있었다.


"발표 났어???"

"아직... 피말린다... 이따 다시 연락 줄게."


(2시간 후)


"지금은?? 발표 났어???? "

"응... 떨어졌어.."


"...."



나의 동갑내기 9년 차 남자 친구는, 5년 차 취준생이다. 엄밀히 따지면 공무원 장수생이었다가 취준생이 된 지 1년 남짓 되었다. 어찌 됐든, 도합 5년간 직장을 가지지 못한 남자 친구는 내 앞에서 죄인이었다. 거기다 하필 코로나 시대에 딱 걸리다니! 안 그래도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 원체 취업문이 좁은데, 코로나가 문을 더 닫아버렸다. 그런 그에게 기적같이 첫 면접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자칭 (타칭) 반반한 얼굴에 한 말빨 하는 그는 줄곧 면접에 자신을 보여왔다. 필기 합격만 하면 다음 단계인 면접은 프리패스라고 나를 안심시켜왔던 그다. 그 말에 깜빡 속아 나도, 그도 이번 면접에 큰 기대를 했던 것이다. 내 앞에서처럼 당당하고 매력적으로 면접관들을 홀리고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왔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그가 면접에 떨어졌다.


스스로도 당황한 눈치였다. 날 때부터 청산유수의 입술 모터를 달고 태어나 우리 엄마 앞에서도 화려한 입담을 선보이던 그였다. 아무리 첫 면접이라도 이렇게 처참히 떨어질 수는 없었다. 적어도 1차 면접은 붙고 최종 면접에서 아쉽게 떨어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최종 면접은 고사하고 1차 면접조차 패스하지 못했다. 그렇게 풀이 죽은 목소리는 9년 만에 처음 들어봤다.


"미안... 나 면접 못 하나 봐... 내가 많이 부족했어..."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자신의 풀 죽은 마음을 돌볼 새도 없이 그는 내게 죄송해했다. 면접을 너무 쉽게 봤던 자만함, 나를 기대하게 만든 점, 첫 면접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점, 아니 5년간 직장을 갖지 못한 점, n년간 나를 기다리게 한 점. 그 모든 것에 대해 그는 미안해했다. 미안한 만큼 그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올곧던 등이 움추러들었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항상 당당했던 그는 풍선 빠져가는 바람처럼 흐물거렸다. 위축되었다. 그날 우리는 함께 소주를 마셨다. 나는 술집에서 '흑흑' 가냘프게 울다가 결국엔 '꺽꺽' 우렁차게 울었다. 그날 밤, 내 몸은 알코올을 마저 해독하지 못했고, 새벽 내내 두 다리가 저려 뒤척여야만 하는 벌을 받았다.


그랬던 그 날이 약 세 달 전이다.




그로부터 세 달이 지난 지금. 그는 다행히도 또 한 번의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때의 자만함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그다. 한 회사의 면접을 위해 하루 두 탕의 스터디를 소화해냈다. 스터디가 끝나면 독서실로 출근해 스터디 내용을 정리했다. 면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어디에 있든, 쫓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동시간에 틈틈이 내게 전화를 하며 스터디에서 배운 내용을 복기하기도 했다.


"그 형이 그랬는데, 면접에서는 면접관들과 '대화'하는 게 중요하대.

내가 준비한 내용을 보여주는 거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거!

근데 나는 외운 거를 말하는 데 급급 하대. 그래서 나도 소통해보려고."



나도 그에게 도움이 되는 멋진 말을 해주고 싶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그에게. 바람이 되어 자신감을 빵빵히 불어넣어줄 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와의 연애 초창기로 내 기억이 흘러들었다.



갑자기 우리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야겠다. 웬 뚱딴지냐 하겠지만, 글의 흐름상 꼭 필요한 부분이니 어쩔 수 없다.


우리는 20살,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 당시 나는 다른 남자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고, 내 레이더망이 그 선배만 쫓느라 다른 남자들은 안중에도 없던 그런 시절이다. 그 와중에 이 친구는 나를 마음에 두었다. 나는 사람 대 사람으로, 그는 남자 대 여자로 서로를 간주하며 서서히 가까워졌고 친해졌다. 온 신경이 남자 선배에게 쏠린 나는 연애 상담을 하겠다고 이 친구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았고, 이 친구의 마음을 더욱 애타게 만들었댔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고백을 해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바로 너라고.


전혀. 1도. 예상치 못했던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눈물이 삐쭉 튀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고민이 시작됐다. 가능성 없는 선배를 향한 짝사랑이냐. 나 좋다는 사람과의 연애냐. 두 마음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나는 어느 쪽 손도 들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고백을 하고 난 다다음날. 그는 밥이라도 먹자 했다.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어도 일단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밥을 먹었다. 내 마음이 어떻냐고 물어봤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일련의 거절이었다. 아직 선배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고, 이 친구의 고백은 너무나 갑작스러웠으니.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 친구는 나름대로 티를 많이 냈다고 했다. 다만 내 레이더망이 선배만 추적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 거라고..) 내가 누굴 거절할 처지는 못되지만, 마음이 없는데 연애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의 풀 죽은 모습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한껏 움츠러든 뒷모습을 상상하며. 그 야릇한 죄책감을 기대하며.


그런데 그는 쑤욱,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아니, 내가 거절했는데...? 내가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나를 잡은 따뜻하고 큰 손이 꾸욱, 더 감싸 쥔다.

이놈이...? 아주 웃긴 놈이네 이거? 이 자신감은 뭐지? 초라해야 하는 지금의 너는 왜 이렇게 당당해? 왜 멋있어? 피식. 짜식 박력 쩌네. 한 번 만나봐...?

그렇게 그는 선배를 무찌르고 나의 허락을 받아냈다. 9년 전, 우리의 첫 시작 이야기이다.




거절당함과 동시에 손을 잡는 당당함. 상식을 벗어난 박력. 뻔뻔하디 뻔뻔함. 웃기게도 거기서 믿음을 엿봤다. 얘, 뭔가 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엄청난 애다. 묻고 더블로 가도 되겠다!!!! 내 판단은 9년째 옳았고 앞으로도 옳을 예정이다.


“그러니까 난 네 뻔뻔함이 좋았어.”


이미 닫힌 마음도 활짝 열리게 하는 너의 뻔뻔함.

틈새를 놓치지 않고 비집는 너의 노련함.

부드럽게 틈을 벌리는 기분 좋은 능글함.

작은 창피는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는 여유로움.

9년 전, 누구보다 단호하고 의심 많던 여성 면접관을 홀려버린  박력과 당당함.

이제 그 당당함이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할 차례다.



내일 면접 잘 보고 와!

당당하게, 뻔뻔하게, 박력 있게,

나를 정신없이 홀려버린 그 마력같은 매력과 함께!!!



(이 세상의 모든 취준생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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