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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e Jun 23. 2020

미안하지만 부케는 못 받겠어요.

나는 nada. 오로지 나로써 존재하기.

(1부)


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청첩장을 건넸다.

" 부케는 네가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내 주위에 너네처럼 오래 잘 사귀는 커플은 없거든.

부케 생각하면 네가 바로 떠오르더라. 받아줄 거지? "

나는 부케 받기에 적합한 친구인가 보다. 부케 부탁을 자주 받아봤으니 말이다.


이런 명성을 차지하기까지 나의 9년 차 장기 연애가 한 몫했다.

" 벌써 9년이나 사귀었어? 우와... 시간 빠르다. "

그 뒤에 붙는 " 근데 왜 결혼 안 해? "에도 익숙해진 지 오래다.

나는 9년이나 사귀었으면 결혼을 하든가 청산을 하든가 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시선에 둘러싸인 채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친구들의 부케 부탁을 기쁘게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

결혼 소식을 들을 때마다 ' 부케를 부탁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앞서니 말이다.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진땀 나는 일이다.

" 우린 아직 결혼까지 너무 많이 남아서 받기가 좀 그래.. " 하면 입은 막을 수 있지만 의문에 찬 동그래진 눈동자들을 생산하는 꼴이다. 눈동자들도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9년이나 사귀었는데 아직도 결혼을 못하다니!

왜 결혼을 아직 못할까? 돈이 없나? 형편이 안 좋나?

직업이 별론가? 시댁이 별론가? 부모님이 반대하시나? 조건이 별론가?

서로 간보나? 결혼할 사이는 아닌가? 근데 왜 9년이나 사귀지? "


다 들린다 이것들아!!!!!!!!

아니, 사실 들리지 않는다.

모두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다.

아니, 사실 세상이 나에게 하는 소리다.

9년의 연애에 결혼의 '의무'를 부과하는 세상이 나에게 하는 소리다.





의무. 사전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설명된다.

그러니까 9년의 연애로 인해 내게 결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시선이 주는 불편함이 부케를 기쁘게 받을 수 없는 마음 상태를 만들어놓았다.

이토록 불쾌한 의무는 처음이다.


의무.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많은 의무를 지고 태어난다.

딸의 의무. 학생의 의무. 직업인으로서의 의무. 결혼의 의무. 부모의 의무. 납세자의 의무. 투표권자의 의무. 시민의 의무...


그리고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Type 1. 의무를 남김없이 이행함으로써 존재를 정당화하는 인간.

Type 2. 의무를 거부하고 존재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

여기까지 오니 사르트르의 '구토'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거부감이 들려고 하는 거 다 안다. 괜찮다. 나도 이해했으니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최대한 쉽게 설명해보겠다.




(2부)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부터 지속적인 구토감을 느낀다.

내가 가위를 잡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위가 나를 잡는 듯한 느낌.

내가 포크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포크가 손을 알맞게 감는 듯한 느낌.

인간은 사물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물들이 탈출하려고 꿈틀거릴 때 구토감이 느껴진다.

이게 뭔 소리냐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붙여놓고 '음. 내가 이 사물을 지배하고 있어.' 하고 생각한다. 앉는 것들에는 '의자'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안심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가 그것을 '의자'로 부르던 '의지'로 부르던 '으자'로 부르던 상관없이 그 물건은 거기에 그대로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물을, 세계를, 사건을 이름 붙이고 설명하는 것들이 쓸모없는 짓으로 느껴진다. 우리가 어떻게 정의하고 부르든 간에 그들은 그대로 거기에 있을 테니까. 사물은 자신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말로부터 탈출하려고 꿈틀댄다. 우웩, 구토감이 든다.


그리고 로캉탱은 사물뿐 아니라 인간도 '이름' 붙여지고 지배당하고 있음을 느낀다. 인간에게 부여된 '이름'이란 '의무'의 이름이다. 로캉탱은 시립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가 150점의 초상화를 본다. 그 초상화는 도시에서 의무를 다 하고 업적을 이룬 훌륭한 사람들의 초상화다.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당신도 나처럼 혼인을 하고 좋은 직업을 갖고 자식을 낳고 하느님을 믿고 업적을 남기시오."하고 의무를 명령한다. 그런데 우리의 로캉탱은 꿈쩍 하기는커녕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 나는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버지도 남편도 아니다. 투표도 해 본 적 없고, 세금도 안 낸다. 선거인의 권리, 납세자의 권리, 또는 20년 동안 고용주에게 순종한 데 대한 권리조차도 자부할 수가 없다.
나 자신조차도 나라는 존재가 정말 놀라워지기 시작했다."



로캉탱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냥 자신인 채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의무를 이행하고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데 급급하다. "나는 좋은 어머니니까 가치가 있어. " "나는 좋은 아내니까 가치가 있어." 하지만 로캉탱은 그냥 자신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자신은 의무가 없으니 가치도 없다. 자신이 무의미하게 살아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의무와 권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 인간의 훌륭한 정복이 거기에 있었다. 바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라는 꽃다발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의 지배에 감탄했다. "


우리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것으로 내 존재를 정당화한다. 엄청난 착각이다. 내 존재는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니까. 존재 자체로 이미 마땅하다. '의자'로 부르던 '으자'로 부르던 그 물건이 거기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어떤 의무를 뒤집어 씌우던 나는 여기에 그대로 있다. 그러니 의무를 잘 이행할 필요도, 아니 이행할 필요 조차 없다. 의무는 '지배'에 붙여진 예쁜 닉네임일 뿐이다.






로캉탱 이야기는 여기까지.

다시 되돌아가 보자.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Type 1. 의무를 남김없이 이행함으로써 존재를 정당화하는 인간.

Type 2. 의무를 거부하고 존재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

부케 받기를 두려워하는 나는 어떤 인간이었나?

결혼이라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해 존재를 비참하게 여겼던 나는 Type 1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로캉탱을 만난 지금은 Type 2의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떤 인간이 되려고 하는가?

의무를 거부하고 존재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이 되어보려고 한다.

사회는 손쉬운 '지배'를 위해 끊임없이 의무를 씌우려고 들 것이다.

친구의 시선으로, 어른의 잔소리로, TV나 영화 등의 미디어로, 그리고 사회 통념으로.

하지만 씌워지는 의무를 족족 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의자가 '의자'로 불리던 '으자'로 불리던 상관없듯이.


나는 나다. 의무 없이도 나다. 나는 가벼운 나다. 그냥 나다.

10년 연애에 미혼이어도 나다. 15년 연애에 미혼이어도 나다.

나를 어떻게 보든 나는 나다. 심지어 의무를 벗어던진 용감하고 멋진 나다.


두 달 잠깐 스페인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nada [나다]는 영어로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님, 무無 를 뜻하는 단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의무로써 존재를 판단하는 사회가 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 nada인 나다. 기막힌 언어유희가 아닌가.



그리고 기막힌 자유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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