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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Feb 04. 2024

133

2.4

1

무성한 빗발이 감긴 눈 사이를 열어젖힌다. 몸 곳곳으로 뚫고 들어오는 볕의 기운. 이상하게도 우울이 한 겹 녹는다. 겨울은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지독한 고독의 얼음바닥이.


2

젊음이라는 낡은 책장이 한 장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다. 어쩌면 절반에 가까이 왔거나 이미 절반을 지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후자였으면 좋겠다.


3

과거를 생각하면 너그러워야 할 것 같고, 현재를 생각하면 직면해야 할 것 같고, 미래를 생각하면 용감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단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잘 됐다. 이제 끝내주게 방황할 일만 남았다. 방황하는 인간은 파손될지언정 파괴되지는 않으니까.


4

깨진 저녁 아래로, 한 방울 씩, 뚝뚝, 떨어지는, 피고름, 물, 내가 걸어온 길 위에는 꼭, 염산 같은 키스를 퍼부어줄 테다.  


5

휘몰아치는 것들을 맞으며 기다리는 자가 될 때. 희망이라는 병세는 악화되고. 


6

그거 참, 몹쓸 짓이다.


7

나는 습격되지 않을 것이다. 불길한 바람이 엄습해 올 때도 나는 꾸룩꾸룩 내장으로 웃으면서 그것이 어서 내게 닥쳐오기를 기다렸다. 묵묵히 눈을 부릅떴다. 날마다 어디 가까운 데서 태풍 같은 게 오고 있다. 그것이 발 끝가지 온 순간. 나는 그 속으로 풀쩍 뛰어들어간다. 맨발의 미치광이처럼. 태풍의 눈으로. 그 고요한 중심으로. 


8

진실은 대개 우습고 시시한 법. 겉껍질은 요란한 법이다. 


9

다시 삶으로 떠오르기 위해 나는 나의 재난을 황홀하게 바라본다. 나를, 기억을, 감각을, 고통을, 가동한다. 괴로움이야말로 생인 것을 망각하지 않으며. 일그러져 웃는다. 표피가 발악하듯 웃는 것. 필경 인간이 그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병듦과 회복은 계속된다. 그것 참, 근사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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