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주한 것은, 사랑이 남긴 따뜻한 추억이 아니라 그 사랑이 떠난 자리의 시린 공허함이었다.
봄의 끝과 여름의 시작이 뒤섞인 계절인 오월이다. 매년 느끼는 거지만 올해 오월은 더 묘하게 달다. 모든 것이 싱그럽고 새로워 보이지만 그만큼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오월의 어느 날, 나는 군에서 나흘간의 짧은 휴가를 받았다. 부대에서 준비한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에게 그 시험은 단지 명분이었고,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건 오랜만에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A는 나보다 한 발 먼저 사회로 나간 친구다. 올해 2월 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취업난속에서도 취직에 성공했다. 집에서도 한 참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취업난에서 어렵게 들어간 회사라 얼마 전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취업 스트레스도 끝나서 '행복 시작'이라고 좋아했었는데 사회는 그리 녹록지 않았나 보다. A의 하루는 퇴근 없는 야근이 반복됐고, 통화 중에도 늘 피곤한 기색이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이번 휴가를 나간다고 말했을 때, A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잠깐이라도 얼굴 보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나를 설레게 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시험 당일, 시험에 대한 긴장과 부대 복귀일이라는 피로가 뒤섞인 마음으로 B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쳤다. 하지만 A가 시험이 끝날 때 즈음 학교로 온다는 약속에 피곤함도 잊은 채 교문을 나섰다. 정해진 시험시간보다 일찍 나와서인지 A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때마침 집 근처라 부모님이 먼저 반갑게 나를 맞았다. 부모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흰색 차량 한 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A였다. 휴일이라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겠지만, 나를 위해 일부러 수십 킬로를 달려왔다. 부모님과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그녀의 차에 올랐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몰랐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 차 안의 공기는 이상하게 무거웠다. 음악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어떤 소리도 마음에 닿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봤다.
'운전하느라 집중하느라 그런 걸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터미널 근처에 도착했을 때, A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주변의 공기와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했다.
“민수야, 우리... 그만하자.”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현실감 없이 귓가에 흩어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소한 일에도 웃었고, 통화로 서로의 하루를 위로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날의 A는 낯설었다. 이미 마음속 모든 결정을 끝낸 사람의 표정이었다.
A는 그 말을 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버렸다. 남겨진 나는 버스 터미널 의자에 앉은 채 두 시간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버스 출발 안내 방송이 몇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부대에 복귀하면서도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 한마디 못 했다. 그날의 나는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난 우리의 첫 번째 이별을 맞았다.
한 달이 흘렀다.
이별의 충격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훈련과 일과로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저녁마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A에게서 연락이 올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기대는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A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끝이 떨려 답장을 보내는 데 몇 분이 걸렸다. 이상하게도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다. 우린 다시 예전처럼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들처럼 다시 이어졌다.
그 후로 한 번의 짧은 휴가가 있었지만, 그녀의 바쁜 회사 생활 때문에 제대로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전역일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이제 곧 전역이니 더 자주 볼 수 있겠지.' 막연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전역을 3주 앞두고 마지막으로 나온 휴가, 우리는 3일간의 여행을 계획했다. 그 여행은 마치 오래된 약속을 지키는 시간 같았다. 차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낯선 도시의 거리 그리고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들까지 어떤 순간의 데자뷔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는 ‘우리 사이가 다시 괜찮아졌다’는 확신을 얻었다. A는 피곤했을 텐데도 주말 이틀과 하루 더 연차를 내어 시간을 함께했다.
'이제 진짜 괜찮을 거야.'
하지만 오히려 강한 믿음은 항상 가장 먼저 흔들리는 법이다. 휴가가 끝나고 부대로 복귀한 뒤부터 이상하게도 그녀의 연락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루에 한 번 오던 메시지가 이틀, 사흘로 늘어갔고, 통화는 핑계처럼 미뤄졌다. 내 전역일이 가까워질수록 A는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또다시 이별이 오고 있구나.'
전역일 전날 밤,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짧고 단호한 문장이었다.
'민수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첫 번째 이별이 격렬한 폭풍이었다면, 두 번째 이별은 영혼 깊은 곳에 조용히 쌓이는 아픔이었다. 눈물도, 아쉬움도 없었다. 그저 깊은 침묵만이 있었다. 이미 마음 한구석은 오래전부터 그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역 당일 가족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내 마음까지 닿지 않았다. 나는 웃으려 애썼고,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그 미소를 받아주셨다.
그날 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마주한 것은 사랑이 남긴 따뜻한 추억이 아니라 그 사랑이 떠난 자리의 시린 공허함이었다. 열렬히 사랑했다는 기쁨보다 그 열렬했던 감정이 영원히 식어간다는 사실의 무게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 뒤, A와 함께 가기로 했던 일본 여행 일정이 다가왔다. 이미 A의 티켓은 취소한 상태였다. 고민했다. '내 표도 취소할까? 아니면 그대로 떠날까?'
혼자 가는 여행이라니 차량 맞게 느껴졌고, 공허함이 마음속 한 곳을 무겁게 눌렀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행이 어쩌면 진짜 이별의 끝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쿄의 거리는 낯설지만 화려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 속을 분주히 움직였다. 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했고, 처음으로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A와 함께 왔더라면'이란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웠고, 내 앞에 있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게 내가 홀로서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디게 흐를 것 같았던 나흘의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창밖으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그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랑의 완성이 꼭 영원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이별이라는 결과도 사랑의 장르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이라는 냉혹한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그 페이지를 채웠던 모든 감정과 진심이 얼마나 귀했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별은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지 않을까.
이별은 내게 상처였지만 동시에 성장의 시작이었다. A는 떠났지만, A를 사랑했던 시간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여전히 내 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다시 내게 돌아오는 과정이라는 것을.
시월의 끝에서 나는 사랑을 잃었지만 나 자신을 다시 찾았다. 그 기억은 여전히 아프지만 아픔조차도 결국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고마웠다. 나의 아픈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