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왕 나이팅게일의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치다
시차 적응이 덜 되었는지 잠을 자다 중간에 깼다. 시계를 잠깐 보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한번 깬 잠이 다시 오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중간에 잠을 깼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잠이 들었을 텐데. 몇 번 뒤척이다 파테에 대한 글을 쓰다 만 것이 떠올라 계속 쓰기로 했다. 이왕 깬 잠을 더 확실하게 깨기 위해 발코니로 나갔다.
어느 나라든 그러겠지만 시골의 밤은 평화롭다. 글을 쓰다 말고 테라스에서 담배를 한 대 태우며 생각을 다듬던 중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듣게 되었다. 시간은 새벽 2시 반 정도였다. 한국의 도시에서 이 시간에 우는 것은 몇 없다. 한여름의 매미거나, 구급차거나, 술에 잔뜩 취해 감정이 북받쳐 오른 누군가겠지.
사실 도시에서 듣기 어려울 뿐이지 한국에도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밤에 우는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쩍새나 뻐꾸기는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밤에 우는 새들이다. 밤에 우는 소쩍새는 심심찮게 시나 소설에서 한의 정서와 연관되어 드러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휴가지 수영장 옆에서 밤에 우는 처량한 뻐꾸기 소리를 들어본 기억도 난다. 어머니와 꽤 진지한 대화를 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상 깊은 밤이었기에 일기를 썼고, 그때 그 기억은 그대로 내 첫 책 제목의 모티브가 되었다.
밤에 우는 새 소리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들었던 그때 그 장소에서 이곳은 약 9000km 떨어져 있다. 9000km는 새 소리를 바꾸기에 충분한 거리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들리는 소리는 한국에서는 못 들어본 새 소리다. 밤에 우는 새로 유명한 나이팅게일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이팅게일은 밤에만 우는 새가 아니라 낮밤 구분 없이 울어제끼는 새인데 밤에 특히 그 소리가 잘 들려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린단다. 다 똑같은 종의 울음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울음소리가 다양하고 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운다는 사실이 나름의 어필을 했는지 유럽 문학을 읽어보면 나이팅게일 역시 슬픔의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시인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나이팅게일의 창의적일 정도로 다양한 울음소리와 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것을 멈추고 잠깐 귀를 기울였다. 나이팅게일은 한국어로 밤꾀꼬리라고 할 정도로 울음소리가 예쁘다. 설핏 들으면 어떤 울음소리는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 같기도 하다. 나이팅게일이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모래알만큼이라도 준 것이 분명하다. 여러 마리가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우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정신없이 펼쳐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유발한다.
여행을 오니 모든 것이 새로워서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고 시간도 넉넉해서 생각이 떠오를 때면 아무 때나 글을 쓰게 된다. 마치 밤낮없이 울어대는 나이팅게일 같다. 시차적응이 덜 된 덕분에 또 한 번 새로운 경험을 하고 글을 쓴다. 눈이 열리고 귀가 트였다. 이 곳 사람들에게는 이 마저도 일상의 일부분일 뿐이겠지만 낯선 이방인은 그들의 일상 속에서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앵글로색슨어로 나이팅게일은 nightsongstress라던 설명을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나이팅게일에 왜 ‘밤에 우는 스트레스’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이제는 슬슬 이해가 가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파테에 대한 글을 새벽 3시 반쯤 마무리 지은 후 잠을 자려고 하는데 나이팅게일 소리에 잠을 못 이뤄서이다. 여행 와서 귀가 트인 것에 대한 첫 부작용이다. 새벽 3시 30분, 파테에 대해 쓰던 글을 마저 마무리했을 때까지 나이팅게일 소리는 마치 천사의 음악처럼 들렸다. 지금은 전사의 음악 같다. 천 년 전 앵글로색슨족의 분노에 깊이 공감을 하게 된다. 글을 쓰다보니 시계는 벌써 새벽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1시간 반 후에는 아침을 먹으러 가야 하기에 더 잠을 청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테라스에서 그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있다. 이렇게 셋째 날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