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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인상 Paris Impression

도서관 가는 길 - 파리 13구 도보여행

by Layers

와인저장고를 개조한 베르시 빌리지(Bercy village)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 영화관 등이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우리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 친구들의 여행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 그들이 찾아가는 명소들도 덩달아 관심을 받았다. 서울 도심의 고궁이나 남산타워의 야경은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곳이지만, 우리에겐 좀 의외였던 장소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강남의 고층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거리들이다. 때로는 빛의 공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그 거리의 불빛이 어떤 이들에게는 화려한 볼거리가 되기도 한다.


한 도시의 인상이 거리의 풍경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건축물 하나가 도시의 인상을 좋게도 나쁘게도 바꿀 수 있다. 일상 속에서 익숙했던 도시의 풍경이 달라지는 순간, 여행자의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자.


유럽을 여행할 때면, 아무래도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여행계획을 짜게 된다.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라데팡스나 런던의 시티 오브 런던 정도가 아니면 시내의 신시가지에 가 볼 일이 별로 없다. 그마저도 가지 않는 관광객도 많다.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현대건축물은 대부분 새로 지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기차역 정도가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래서 건축가 남편을 따라 나선 건축여행은 좀 색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다. 같은 도시를 가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을 찾아가고, 같은 거리에서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특히 파리는, 이전과는 굉장히 다른 인상으로 남게 된 것 같다. 그것은 파리에서의 어떤 하루 때문이다. 파리 동남부의 베르시(Bercy)에서는 중세시대 와인창고를 개조해 레스토랑과 상점을 만들고, 문화공간으로 바꾸었다. 버스를 타고 베르시 공원 쪽에 내리면,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émathèque française. 2005)가 자리 잡고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영화자료를 보존, 복원하는 것이 주 임무로 전 세계 영화 필름 40만여 개를 소장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영화역사 박물관이다. 프랭크 게리 특유의 도형을 잘라서 쌓은 듯한 건물이 반긴다. 색깔과 모양이 프랑스 고성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앞쪽으로 센 강을 따라 쭉 공원이 이어지고, 강 건너편에 보이는 높은 건물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다.


impression-01.jpg 넓은 잔디밭 사이로 걸어가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나온다. 비 내린 후 흐린 하늘 덕분에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내부도 궁금했지만 오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라 거리다.


공원을 지나자 나지막하고 깔끔한 주택가가 이어진다. 점점 번화한 거리로 접어들면 베르시역 앞으로 아치가 보인다. 와인저장고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동네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러 나와 제법 북적인다. 채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이 많았지만, 굳이 뭘 하지 않고 걸어만 다녀도 즐거워지는 거리였다.


impression-04.jpg 길 한편에는 1층에 상점이 있는 단정한 주택가가, 다른 편에는 센 강을 따라 공원이 이어진다. 잠시 지나는 객이 보기에도 깨끗하고 살기 좋은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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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저장고를 개조한 베르시 빌리지(Bercy village)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 영화관 등이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베르시(Bercy)를 슬렁슬렁 구경하고 센 강을 건넌다.


서울에 강남과 강북이 있는 것처럼, 파리에는 센 강의 왼쪽[좌안(左岸)]과 오른쪽[우안(右岸)]이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파리 지도에서 센 강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데, 강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우안, 왼쪽이 좌안이다. 베르시는 우안에 있었고, 이제 좌안으로 건너온 것이다. 행정구역으로는 파리 13구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구세군 회관(Armée du Salut. Cité de Refuge: 노숙자 쉼터. 1933)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저 모양과 색감은 “나, 르코르뷔지에요!” 하는 것 같다. 1933년에 완공된 구세군 회관에는 무주택자들이 쓰는 방도 함께 있어서 내부 구경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쉽지만 로비에서만 슬쩍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유리블록이 처음 나온 것이 1928년이라고 하니, 당시에는 첨단 소재였다.


그런데 구세군 회관을 보고 나와 걷는 길이 영 수상하다. 커다란 블록 전체가 건설 현장이다. 보통의 현장처럼 땅을 파 내려간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 구조물이 덮여있다. 안내판을 보면 분명 여기 건물을 짓는다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알고 보니 이 일대는 파리 외곽으로 나가는 대규모 철로 때문에 끊겼던 양쪽 지역을 연결하고 개발하는 사업을 해오고 있었다. 이른바 센 강 좌안 프로젝트, 파리 리브고슈(Paris Rive Gauche)이다.


리브고슈 지구에서는 철로를 덮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로 건물과 공원을 만들었다. 청계천 덕분에 복개천(覆蓋川)은 익숙했어도 이렇게 거대한 복개철(覆蓋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impression-13.jpg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지역의 콘크리트 구조물


우리가 갔을 때는 꽤 많은 구역이 새롭게 단장돼 있었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시작된 이 계획은 26년이 지난 지금도 60% 정도만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순식간에 우르르 부수고 짓는 우리나라의 신도시들만 보다가 느림보 도시개발을 보니 신선하다. 살아 보면서 천천히 고쳐나가는 느낌이랄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쪽이 더 윤기 나는 거리가 되어 있을까 궁금해졌다.


리브고슈 지구를 걷다보면 골목골목 독특한 건물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전차가 다니는 큰길에는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번쩍번쩍 특이한 건물들이 가득하다. 도로변에 장식해 놓은 조각품마저 독특하다. 마치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창작촌 같은 분위기다.



프랑스가(Avenue de france) 전차 정류장 앞의 풍경. 흐린 하늘 아래 색깔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개성적인 건물들. 얼핏 보이는 낡은 건물의 모습이 이곳이 재개발 지역임을 알려준다. 정류장 앞 광장에 놓인 돌은 프랑스 예술가 디디에 마르셀(Didier Marcel)의 작품 <The Rocks in the Sky>이다.


그런데 이 건물들이 그냥 주거단지라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발코니마다 놓여있는 화분이며 테이블이며 세간들이 보통의 살림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리브고슈 지구의 집들은 임대주택과 일반분양이 반반의 비율이고, 기숙사도 섞여있다고 한다.


이곳의 건물들은 누가누가 더 특이한가, 누구 아이디어가 더 튀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정말 과감하다. 기술이나 디자인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다. 짓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이런 집을 선택하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아마 이 중 하나만 우리나라에 갖다 놔도 눈에 번쩍 띌 것이다. 어르신들은 정신사나워서 이런 데 어떻게 사냐고 고개를 내저을지도 모르겠다.


가만 보면 하나하나가 다 제각각의 설치미술 작품 같기도 하다. 이토록 대담한 색과 재료들을 집에 사용하고, 이런 집이 허용되는 분위기라니! 이래서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고 하는 것인가!


광택이 있는 초록 타일을 붙인 건물은 마치 양파망처럼 금속 그물로 안전하게(!) 전체를 싸놓았다
큐브를 돌려놓은 것처럼 만든 건물. 두 동 같지만 아래가 이어져 있는 하나의 건물이다. 발코니에 꼭 섀시를 설치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하도 특이한 모양이 많으니, 나중엔 직선과 사각형이 반가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네모도 그냥 네모가 아니다. 창문 하나도 똑같이 뚫어 놓은 게 없다.



네모도 그냥 네모가 아니다. 설마 이건 사무실이겠지, 하면 어김없이 창문이나 발코니에 아이들 물건이 보여 내내 허를 찔리는 것 같았다


기후 특성상 덧창을 설치하는데, 덧창을 이용한 재밌는 시도도 많이 보였다. 어떤 것은 우리집에 설치하고 싶기도 했다


리브고슈 지구는 강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데, 5구역으로 나누어 크리스티앙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 폴 앙드뢰(Paul Andreu), 장미셸 빌모트(Jean-Michel Wilmotte) 등 유명 건축가들이 마스터 플래너로 참여하고 있다. (맞춤법상 외래어 표기법에 따랐음을 양해 바람) 또한 거리와의 관계나 정원, 옥상 등에 대해 까다로운 건축 지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건물이 지어질 수 있었나 보다. 건축가마다 서로 다른 해석과 풀이로 자신의 정답을 찾아나간 결과물들인 셈이다.


또 한 가지 재밌었던 것은 골목에서 갑자기 마주치는 대학 건물들이었다. 캠퍼스에 담장을 두르고 학생들이 그 안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주택가와 사무실이 이어지는 거리에 대학 건물이 섞여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학교인지 알기 힘들었다. 마치 거리 전체가 캠퍼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파리 리브고슈 계획에는 대학을 도시에 통합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런 거리 구성과 주거지 사이에 섞여 있는 학생들의 기숙사 덕분에, 대학가가 끝없이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조용한 길을 걷다보면 조금 번화한 길이 나온다. 국립도서관 지하철역 근처에 형성된 상업지역이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거리는 사람도 많고 활기차다. 시원하게 뻗은 길과 현대적인 분위기가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관광객이 뒤섞여 북적이는 시내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가면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1996), 일명 미테랑 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다. 워낙 커서 멀리서부터 눈에 띈다. 도서관은 다른 건물들 너머로 삐죽 바라보이는 것보다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훨씬 기대감이 생겼다. 우선은 시원하게 뻗은 모습이 좋았고, 책을 펼쳐서 세워놓은 것 같은 모양도 끌렸다. 단순한 아이디어일 수 있지만, 참 세련되게 표현했다. 금색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고급스러운 금색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직사각형 땅의 네 모서리에 책을 세워놓은 것처럼 똑같이 생긴 네 개의 건물이 서 있다. 각각 숫자(numero), 문자(lettre), 법(loi), 시간(temps)을 의미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1988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지어졌는데, 건축가는 이화여대의 지하건물 ECC를 설계한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다. 당시 무명의 젊은 건축가였던 도미니크 페로가 유명 건축가들과 경쟁한 국제공모에서 당선되어 일약 스타 건축가가 되었다고 한다.


꼭 나무처럼 보이는 회전 블라인드는 나뭇결을 입힌 알루미늄이라고 한다. 건물의 인상을 좌우한다.


밖에서 한동안 도서관 건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창문 뒤에 회전하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장서들을 보호해야 하는만큼 빛을 차단하는 기능적인 면도 있겠지만 돌아가 있는 모양에 따라 밖에서 볼 때 건물의 무늬가 달라진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블라인드 때문에 금빛 건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도서관을 설계한 도미니크 페로는 이 차양들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는 높이 올린 기단에 유리로 만든 투명한 네 권의 책을 반쯤 펼쳐 놓고, 서고를 모두 그 안에 넣는 디자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 사서들이 책을 훼손시킨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차양을 만들게 됐고, 책도 일부는 지하로 내려갔다고 한다. 또 서가가 네 군데로 나뉘어져 있어 분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또 다른 이유로 우리나라 뉴스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도서관이기도 하다. 2011년에 대여 형식으로 반환된 외규장각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도 이곳에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처럼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니라서 도서관에 찾아가도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책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빌딩 네 개 가운데에 마치 숲 같은 거대한 지하 정원이 놓여있다. 도미니크 페로가 이화여대에 거대한 지하공간을 만든 데에는,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야외공간이 참 좋아서 겨울바람이 제법 매서운데도 사람들이 꽤 나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추우니까 후퇴해서 로비로 들어선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첫눈에 반할 만한 공간이었지만 나는 그냥 편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물론 건축가 남편은 힘닿는 데까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지하에는 공공 열람실과 연구실들이 있다고 한다.


로비는 밝고 따뜻하고 아늑했다. 지하인데다 흐린 날씨에도 정원을 향한 커다란 창으로 충분한 자연광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가에도 들어가 보면 좋을 것 같긴 했지만, 외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잠시 이 아늑함을 즐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빨간 카펫 사용의 좋은 예. 발자국 소리는 물론이고 사람이 많은 도서관 로비의 소음도 흡수하고, 빨간색이 생기를 준다. 편안한 의자가 놓인 로비의 창가 자리는 명당이었다


물론 건축가 남편은 중정을 향하고 있는 복도를 따라 반대편 건물까지 두 바퀴나 걷고는, 중정을 더 보겠다며 데크에 나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의자와 한 몸이 되어 가까워졌다가 다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 후에도 우리는 강변을 따라 지하철역까지 걷고, 어두워진 다음에야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두 시간이나 더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도서관 앞에서 바라본 센 강. 다리를 건너면 베르시와 연결된다.


프랑스에는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뜻하는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말이 있다. 한두 마디로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렵지만,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자유롭게 개성을 뽐내는 보통의 건축들을 잔뜩 보고 나니, 결국 톨레랑스는 기존에 없던 것, 새로운 것, 젊은 창작가들의 생각에 편견을 갖지 않는 것, 도전하는 것, 기회를 주는 것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부터 프랑스 국립박물관까지, 센 강의 우안과 좌안을 누비며 박물관과 미술관의 작품들만큼이나 독특한 거리의 예술품들을 구경한 하루. 지금까지 알던 파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가지게 된 도보여행이었다. 파리의 진짜 풍경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파리의 건축가들과 그 실험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파리의 시민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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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리브고슈에 대한 조언을 해주신

‘건축과 도시에 대해 공부하고 가르치는 둥이 아빠’ 김석원 선생님께 감사를 전한다.

덕분에 달팽이 요리도 먹어봤다!

* 각각의 자세한 정보는 각각의 홈페이지에서 알 수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http://www.cinematheque.fr

베르시 빌리지 https://www.bercyvillage.com

파리 리브고슈 http://www.parisrivegauche.com

프랑스 국립도서관 http://www.bnf.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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