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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ers Nov 23. 2021

빠담빠담 파리

케 브랑리 박물관 Le Musée du Quai Branly

파리에서 에펠탑은 특별한 존재다. 자신의 집을 여행객에게 빌려주는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는 아주 조그만 창으로 멀리 손톱만큼만 에펠탑이 보여도 ‘에펠탑이 보이는 창’이 있다고 홍보한다. 에펠탑이 잘 보이는 강 건너편 카페는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바로 옆 가게보다 커피값이 비싸다. 


샹젤리제 거리 뒤편의 숙소에 처음 들어가던 날, 건축가 남편의 투덜거림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그 거리에 즐비한 명품숍들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투덜거림은 길게 가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본격적인 파리 구경에 나선 이튿날 아침. 5분 남짓 걸어 센 강변에 도착해 마침내 눈앞에 에펠탑이 나타났을 때, 그의 투덜거림은 쏙 들어갔다. 아침마다 동이 트는 센 강에서 에펠탑과 인사하고 불빛이 반짝이는 강변을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것은 즐거운 일과였다.



그날 아침에도 눈앞에 보이는 에펠탑에 홀려 강을 건너고 강변을 따라 걸었다. 강변의 작은 카페에서 프랑스식 아침식사 메뉴인 쁘띠 데쥬네(le petite dejeuner)를 주문한다. 보통 커피와 주스, 달걀요리, 크루아상 정도로 구성되어서 여행에 필요한 에너지로 충분하다.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이다.

 


오전 9시. 이제 출근하는 자전거도 뜸해지고, 슬슬 박물관과 미술관도 문을 열 준비를 할 시간이다. 다시 에펠탑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눈에 확 띄는 건물 하나를 만났다. 건물 외벽을 온통 식물이 뒤덮고 있다. 담쟁이 말고는 이렇게 식물이 건물을 가득 뒤덮은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건 한 가지 식물이 아니라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도 있고, 색깔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잡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중구난방은 아니고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 튀지만 튀지 않고 자연스러운 신기한 느낌이었다.


원래는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지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건축가 남편이 좀 과하다 싶게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알고 보니 필하모니 드 파리(Phliharmonie de Paris)를 설계한 장 누벨(Jean Nouvel)의 건물이라고 한다. 외벽의 초록은 조경 디자이너와 식물학자가 2년 동안 여러 식물을 심어 보면서 공들여 만든 정원(Vertical Garden Wall, 수직정원)이란다. 무작정 에펠탑을 향해 가는 줄 알고 따라왔는데 그분 머릿속에는 이미 파리 건축 지도가 작동하고 있었나 보다.

 

높이 12미터의 건물 외벽에 만 오천 포기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수직 정원. 한겨울에도 푸르름이 가득하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수직정원이 시도되고 있는데, 여행 이후 새로 조성하는 수직정원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문을 가리는 디자인이었다. 물론 완전히 가리는 건 아니고 개폐가 가능한 구조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수직정원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겉이 푸르게 둘러싸고 있어도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햇빛을 받지 못한다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수직 정원을 구경하고 이제 에펠탑 쪽으로 가나 했더니, 방향을 돌린다. 알고 보니 밀림 같은 건물 옆으로 길게 서있는 공사장 가림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박물관 담장이었다. 난 참 눈치 없게도 입구에 도착해서야 박물관이라는 걸 알아챘다. 센 강변 브랑리(Branly) 지역에 위치한 케 브랑리 박물관(Musée du Quai Branly. 2006)이다.

 

전시장 길이만 200m라고 하니 담장이 공사장처럼 길 수밖에 없었다
들어와서 바라본 출입구. 테러에 대비해서 공공장소에 들어갈 때는 꼭 검문을 거쳐야 한다. 코로나 이후는 어떠려나


밀림처럼 우거진 담장 밖 수직정원이 자연스럽게 박물관 안쪽 정원으로 이어진다. 이번엔 벽이 아니라 바닥이다. 우선은 무성한 억새들이 인상적이다. 이런 조경은 프랑스에선 본 적이 거의 없다.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나무와 꽃을 배치하는 것이 프랑스식 정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겨울이라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마치 방치된 공장의 뒤뜰 같았다.

 


케 브랑리 박물관은 비유럽권 지역의 고유한 토착 예술품과 민속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인류문명사 박물관이다. 그래서 박물관의 성격에 맞게 정원에서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떻게든 이름에 인류나 문명이란 말을 넣었을 것 같은데 그냥 동네 이름을 딴 것도 좋은 것 같다. 


입구에서부터 길을 따라 꽤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억새 사이로 박물관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색의 금속 건물이 필로티 위에 떠있고, 색색의 크고 작은 네모난 상자들이 건물 옆에 박혀있다. 장 누벨이 케 브랑리 박물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설계하고 건축한 서울의 리움 미술관에도 검은색의 상자들이 돌출되어 있다. 아마 그 무렵 장 누벨은 전시공간에 비슷한 개념을 적용한 모양이다.


자연의 모습을 닮은 정원처럼 건물도 비교적 편안하게 길게 휘어져 누워있는 느낌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필로티와 만나는 부분은 마치 칠교 조각을 맞춰놓은 것 같다. 조각조각 색깔과 채도가 달라 더 입체적이고 경쾌해 보인다.


 

어느덧 9시 반을 넘긴 시간. 개장 시간에 딱 맞춰왔더니 사람도 없네, 하며 매표소 앞에 섰다. 그런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11시 반에 문을 연다고 한다. 낭패다. 이렇게 늦게 문을 여는 박물관은 처음이다. 두 시간이나 비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에펠탑 앞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공원으로 향한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공원에는 관광객보다는 운동하는 사람이 더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긴다. 하지만 겨울이기도 하고, 진격의 여행 이틀째 아침이니만큼 잠깐씩 멈춰서서 에펠탑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볼 뿐 계속 나아간다. 그대로 쭉 걸어서 샹 드 마르스 공원 끝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지난다. 설마설마했는데 자꾸 케 브랑리 박물관과 멀어지는 게 불길하고 초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목적이 있는 행군이었다. 사관학교 뒤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이다.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작품인 유네스코 본부는 Y자 모양의 건물. 유엔에 자금을 대고 있던 미국의 입김에 밀려 정작 참여 건축가 이름에서는 빠졌다고 하는데, 오늘날 누구나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 때문에 건축가가 됐다는 안도 다다오(Ando Tadao)는 유네스코 창립 50주년에 유네스코 명상공간(Espace de Meditation, 1995)을 만들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던 안도 다다오의 깔끔한 노출 콘크리트가 반가웠다.

 

명상공간 안에서 올려다본 오른쪽 사진의 출처는 유네스코 본부 홈페이지 http://www.unesco.org/artcollection


올 때는 괜찮았는데 1시간 넘게 걸어왔더니 다시 케 브랑리 미술관까지 걸어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샹 드 마르스 공원 덕분에 버스도 지하철도 애매한 위치다. 파리는 아주 큰 도시고, 지도에서 보이는 것보다 모든 것이 멀리 있으니까. 결국 그대로 쭉 걸어서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Invalides) 앞을 지나 로댕미술관까지 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다시 케 브랑리로 돌아갔어도 비슷한 거리였을 것 같기도 하다.


케 브랑리 박물관으로 돌아온 건 오후 1시쯤이었다. 돌아올 땐 지하철을 탔다. 오전에는 강변 쪽 출입구로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뒤쪽 길로 걸어 본다. 강변 쪽에서는 공사장 가림막이라 착각할 만큼 높이 쳐진 유리 담이 있었지만, 반대편은 야트막한 나무 높이에 맞게 자연스럽고 낮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것도 나무인지 울타리인지 구분이 잘 안될 만큼 세련된 나뭇가지 모양이다. 울타리 하나도 작품 같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는 정원이 다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낮은 건물이 길게 뻗어있어 좀처럼 건물 전체의 모습을 담기가 어렵다.

 


길게 놓인 건물의 모습도 저편과 이편이 많이 달라 보인다. 강변 쪽에서 들어올 땐 튀어나온 박스들이 눈에 띄었는데, 반대편에서는 붉은색 외벽이 물고기 비늘처럼 들려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단순한 벽이 아니라 덧창이었던 것이다. 필요에 따라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빛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딱딱한 곤충의 모습 같기도 했다.

 

붉은색 덧창으로 뒤덮인 모습. 흰색은 매표소와 1층 로비 부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편이 건물을 보는데 따라온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커서, 박물관의 전시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게다가 유럽의 입장에서 바라본 비유럽권의 토착예술이라니, 오리엔탈리즘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 같아서 살짝궁 기분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건 굳이 프랑스에서 보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적어도 아시아권은 내가 직접 가서 볼 수 있으니까. (라는 코로나 이전의 시각! 코로나 이후인 지금은 잘 모르겠다. 쫄보인 내가 어딜 갈 수 있을지)


그런데 이 박물관,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되는 2층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매혹적이다. 2층 메인 전시실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디지털 작품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것은 거대한 문자의 강줄기이다. 문자들이 흘러 내려오는 강이라니, 인류문명사 박물관답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담은 문명의 강이 관람객을 향해 흘러오는 것으로 전시는 이미 시작되었다. 덕분에 어두컴컴한 길을 꽤 올라가지만 그 길이 지루하지 않다.

 

영국의 설치 미술가 찰스 샌디슨(Charles Sandison)의 작품 


메인 전시실은 좀 산만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굉장히 어두워서 한참 지난 후에야 눈이 익숙해졌다.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도 많아서인지 소음도 좀 있었다. 거대한 목각 토템들이 서있는 것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런데 어수선함의 진짜 정체는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리 정해진 동선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큰 전시공간도 관람을 시작하고 끝내는 큰 흐름은 있기 마련인데, 케 브랑리는 어느 쪽으로 먼저 가도 상관이 없었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구역이 나뉘어 있긴 했지만, 대륙에 상관없이 과거로 가면 갈수록 본질만 남게 되는 것이 토착예술이라 설명을 보지 않으면 잘 구별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특별히 보려는 것이 있는게 아니라면 마음 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이쪽저쪽 위로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관람하면 된다. 부작용이라면 방향치에게는 혼돈의 카오스라는 것이다. 한동안 방향을 잃고 갔던 곳에 또 가기도 해서 방향감각 뛰어난 남편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오세아니아 전시실


또 한 가지 이곳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전시장 양쪽의 창들이다. 한쪽에는 조금 전 밖에서 봤던 붉은색 덧창이 있다. 칸칸이 덧창이 움직이면서 빛을 조절하는 구조가 안에서 보니 더 잘 보인다. 박물관이라 직사광선을 차단하기 위한 것 같다. 변명 같지만 이 움직이는 창 때문에 방향이 더 헷갈렸다. 저쪽으로 갔다 돌아오면 창문이 열린 모양이 바뀌어 있으니 아까 거기가 아니라 새로운 공간인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던 것이다.

 

덧창이 있는 쪽이 남쪽이다. 오래된 유물들 때문에 덧창으로 햇빛을 조절하는 것이지만 열었을 때와 닫았을 때 실내 분위기도 바뀐다. 


강으로 면한 반대쪽은 마름모꼴 창살이 크게 가로지르는 큰 창이 있다. 오전에 밖에서 볼 땐 주의 깊게 보지 않았는데, 안에서 자세히 보니 창문 가득 초록의 나뭇잎이 가득하다. 나무와 숲을 프린트한 것이다. 갑자기 이 안의 어수선함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햇빛이 내리쬐는 나무 그늘 아래에 이 모든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있으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어쩌면 이 어수선함마저도 의도된 것이었을까?

 

강이 있는 북쪽으로 나있는 마름모꼴 창. 안쪽과 바깥쪽의 빗살 프레임이 반대 방향으로 놓여 교차되면서 마름모꼴을 만든다


박물관 안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전시실에 만들어 놓은 골목길이었다. 벽의 역할도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와 모니터가 설치된 곳에서는 전시 설명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다소 투박한 곡선이라 어둠 속에서 보기에는 테라코타나 흙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만져보니 의외의 촉감이다. 꼭 가죽을 잘라 붙인 것 같았다. 진짜 가죽은 아니겠지만 이걸 다 이어 붙이다니 비용도 수고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들이 박물관의 품위를 한층 높여 준다.

 


박물관 내부는 천장까지 높게 트여있고, 복층 구조처럼 중간중간 위쪽에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각종 민속품들이 가득한데, 그중엔 우리나라 것도 꽤 있다. 아무래도 한복이 크기도 하고 화려하니까 펼쳐서 전시해 놓았다. ‘좀 더 예쁜 것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반가움도 컸다. 자료를 찾아보니 케 브랑리에서 소장한 우리나라 물건이 200점이 넘는다고 한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밖에서 봤던 알록달록한 상자들의 정체도 밝혀진다. 하나하나가 테마를 가진 전시공간이다. 이 전시실들이 좀 감동적이었는데, 아주 조그만 것까지 굉장히 정성스럽게 전시물을 배치해 놨다. 상자는 모두 스물아홉 개인데,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나도 모르게 빠져 들었다. 대충 스쳐 지나가기가 미안할 정도로 꼼꼼하다.

 

상자 안

 

전시를 보고 나니, 아까는 남편 뒤를 따라가며 휘휘 대충 둘러보던 건물이 안에서도 밖에서도 새롭게 보인다. 이래서 건축가 남편이 자꾸자꾸 본 건물을 또 보고 또 보는 모양이다.


원래 케 브랑리 박물관 자리는 에펠탑과 센 강이 가까워서 건축 조건이 까다로웠다고 한다. 에펠탑의 조망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25m 이상 넘지 않도록 고도가 제한되었다. 옛 건물이 많고 그 정취를 지켜야 할수록 조건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신 케 브랑리 박물관이 얻은 것도 있다. 끝 부분 1층에 있는 카페에서의 에펠탑 전망이다. 이곳에서 먹은 점심이 유난히 맛있게 기억되는 데는 이 기분 좋은 창밖 풍경도 한몫한 것이 분명하다. 이 창가에 앉는 것만으로도 이곳에서 차 한 잔 할 이유가 충분하다. 빠담빠담, 두근두근 기대하게 하는 파리의 풍경으로 이 공간이 기억될 것이다.

 


 *케 브랑리 박물관의 전시정보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quaibranly.f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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