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Fondation d’entreprise Louis Vuitton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1970년대, 미국 출장길에 아버지가 사 오셨던 어머니의 소가죽 가방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세월이 남긴 얼룩과 손때가 가득한 채로 나에게로 왔다. 그래도 커다란 통가죽을 재단해서 만든 가방은 튼튼하기도 하고, 모양도 예뻐서 자주 손이 가는 물건이었다. 세상 때가 슬슬 들어가던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가방에 붙어있는 태그가 한 브랜드 로고인 것을 깨달았지만.
건축가 남편을 만난 후에는 건축물에서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한다.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막연하게 ‘여기 좋다’거나 ‘이 건물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곳들이 알고 보니 김수근, 김중업, 김종성 같은 건축가들의 작품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좋은 물건”과 “좋은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과 함께 쌓인 경험과 기억으로 더욱 윤이 난다.
장인들의 정교한 손에서 탄생한 상품들은 종종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따지고 보면 고려청자도 달항아리도 모두 당대에는 좋은 상품이었다.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여러 브랜드의 물건들도 그만큼 값어치 있게 될까? 그건 알 수 없지만 19세기에 부상한 부유한 계층인 부르주아가 고급스러운 궁중 문화를 누리고 싶은 욕구에서 명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도 하니, 그 시작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 속에 상류층의 문화였던 음악, 미술, 사상 또한 이젠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소위 명품 브랜드들이 발달한 곳은 공교롭게도 문화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밀라노는 화려한 명품거리만큼 예술의 도시로도 명성이 높다.
명품 브랜드들은 예술을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많은 브랜드가 뮤지엄을 짓거나 예술작품을 컬렉션 하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상을 만들었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곧 브랜드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들이 만든 뮤지엄과 갤러리 또한 건축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중 최근의 걸작이 바로 파리에 위치한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La Fondation d’entreprise Louis Vuitton. 2014)이다. 파리 서쪽 볼로뉴 숲에 위치한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은 개선문에서 멀지 않지만,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보니 지하철역에서는 꽤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덕분에 멀리서부터 건물이 보인다. 건물이라기보다는 공원에 세워둔 커다란 조각품 같다.
우리가 방문했던 때는 공교롭게도 프랑스 출신의 현대미술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알록달록한 설치작품이 건물을 감싸고 있는 유리 돛에 설치되어 있을 때였다. 건축가 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축물의 원형이 가진 느낌을 바꿔놓은 이 설치작품을 못 견뎌했다. 최근의 여행사진들을 보면 지금은 철수된 것 같은데 타이밍을 원망할 수밖에.
지하철역에서부터 앞뒤로 걷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입구가 가까워지자 점점 그 수가 늘어난다.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꽤 인기 있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어서 관람을 위해서는 미리 시간 예약을 하고, 그 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도착해 긴 줄을 서서 대기해야 했다.
덕분에 허둥지둥 줄을 서느라 바깥의 연못을 못 담았지만, 멀리서 보면 물 위에 떠 있는 범선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밖에서 건물의 모습을 관찰할 시간이 꽤 많아진 셈이기도 했다. 건물 전체를 유리로 만든 돛이 마치 꽃잎처럼 포개지면서 감싸고 있어서 안쪽에 어떤 공간이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커다란 유리 돛은 그 모습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많은 유리들을 제각각인 돛 모양에 맞춰 곡선으로 제작했다니.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생각보다 좁은 입구를 지나 아래로 내려간다. 이렇게 큰 건물에 이렇게 작은 입구라니, 어쩌면 여기가 원래 정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창밖으로 쭉 늘어선 기둥들 사이로 물길이 보인다. 밖에서부터 층층이 흘러내려온 물이다. 기둥은 전체가 조명인 것도 있고, 유리 돛을 위한 기둥도 있었다. 아래로 들어와서 보니 수반이 마치 고성의 해자 같은 느낌도 든다.
실내로 들어와도 확 트인 공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좁은 길로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이동하게 된 걸 보니, 역시 보통의 정문이 아니라 전시실로 바로 진입하는 길로 안내를 한 것 같다. 관람객이 몰리는 것을 감안해 동선을 조정할 수 있는 모양이다. 외관이 복잡하게 생긴 만큼 건물 내부도 마치 미로처럼 여러 가지 동선을 계획한 것 같다.
전시실의 작품들이 유혹했지만, 과감하게 포기하고 건물 구경에 따라나섰다. 입장예약을 해야 하는 줄 모르고 갔다가 파리에서 급하게 예약을 한 터라 관람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건축가 남편을 따라가니 북적이는 로비가 나타났다. 로비를 중심으로 전시실과 강당으로 가는 입구와 서점, 카페가 빙 둘러서 있다. 한 바퀴 둘러보면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곧장 옥상으로 올라간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야외부터 둘러봐야 했기 때문이다. 옥상의 작은 커피 트럭에서 커피를 한 잔 사서 손과 몸을 녹였다. 커다란 식물들과 유리 돛이 감싸고 있는 옥상은 전체가 테라스이자 전망대다. 유리 돛 사이사이 먼 도시의 실루엣이 한눈에 보여서 사방으로 포토 존이 생겼다. 드문드문 비도 오고 날이 흐려서 파리의 빌딩들에 조명이 일찍 켜지고 있었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해 질 녘 블루 아워의 파리와 라데팡스 야경을 보게 됐다. 파리에 산이 없다는 게 이럴 땐 참 좋다.
그렇지만 옥상에서 반짝이는 파리보다 나를 더욱 설레게 한 건, 옥상 그 자체였다. 높낮이가 조금씩 다른 건물의 큰 덩어리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올려다보는 재미, 내려다보는 재미가 있고, 모양도 독특하다. 마치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처럼 구석구석 새로운 시선과 공간이 등장한다. 날이 조금 따뜻한 봄이나 가을이었다면 볕을 쬐며 옥상에서 한나절을 보내라고 해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연신 “와!” 하고 감탄할 때마다 건축가 남편이 으쓱해한다. 자기가 설계한 것도 아니면서도 좋은 건축을 보여줬다는 뿌듯함이 있나 보다.
위쪽이 좁아지는 모양 때문에 iceberg, 빙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길쭉한 하얀색 타일이 가로로 붙여져 있는데, 고급스러운 광택감이 참 좋았다. 마치 거대한 도자기가 서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곡선으로 된 면이 많아서 이걸 어떻게 붙인 건지 곡선으로 제작이 가능한 건지 신기하기도 했다.
어느 한 군데도 직선과 평면을 그대로 둔 곳이 없는 빙산은 정말 빙산처럼 생겼다. 옥상은 몇 개의 단으로 만들어져서 층마다 다른 풍경과 길이 나타난다. 구석구석 재밌는 공간이 많다.
유리 돛부터 진입로와 내부의 동선, 옥상의 구성까지 어느 하나 단순하지 않다. 도무지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 건물은 구석구석 낭비한 공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 복잡한 건물을 설계한 주인공은 미국 출신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을 보기 전까지는 프랭크 게리가 재치 있고 독특한 외관을 잘 빚어내는 건축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직접 경험해 본 프랭크 게리의 공간은 놀라웠다. 도대체 지루할 틈이 없다. 복잡한 만큼 사진 몇 장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프랭크 게리도 처음엔 평범한 직선으로 건물을 만들던 건축가였다. 그런데 40대 후반, 아내가 사들인 마이애미의 목조주택을 자유롭게 리노베이션 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예술가 기질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곡선의 미학을 살린 건축으로 평범함을 거부하는 해체주의 건축의 대부가 되었다. 프랭크 게리는 건축뿐만 아니라 스토리까지 매력적이다.
프랭크 게리의 대표작인 스페인 빌바오에 위치한 구겐하임 미술관(왼쪽), 미국 LA에 위치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마치 은박지를 휘어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건축에 대한 전시는 계단실 하나를 할애하고 있다. 층층이 스케치와 도면, 모형, 영상을 전시해 두었다. 미술관 속의 작은 상설 전시실인 셈이다. 여기 와서 전시실이 아닌 계단실에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우리뿐만은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계획 단계에서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가 보이는 것도 흥미롭고, 설계 과정에서 만드는 모형의 다양한 층위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재밌었다. 프랭크 게리는 원래 자동차나 선박의 설계를 위해 사용하는 3D 프로그램을 이용하다가 나중엔 그 회사를 사들여서 자신의 독특한 설계를 구현할 수 있도록 최적화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모형을 만들어 레이저로 촬영하면 컴퓨터가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 덕분에 공사비나 예산관리도 쉬워졌을 뿐만 아니라 3D로 그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시공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건설 프로세스 솔루션 회사에서 이 소프트웨어를 매입했다.
설계나 건축 과정을 담은 기록영상도 다양해서 실제로 일하는 방식이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을 작은 방에서 두 벽면 가득 채워 보여주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길거나 지루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항공촬영을 많이 하거나 크레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기록물을 만드는 데만도 꽤 많은 투자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 과정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는 계단실도 평범하지 않다. 빙산의 외벽 곡선을 어떻게 공학적으로 구축했는지, 시원하게 개방해 놓았다. 마감에 사용한 재료, 유리 돛을 복잡하게 받쳐주는 프레임들도 부분 부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해 두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은 외관이 평범하지 않은 만큼 늘 새로운 도전이 필요할 것이다.
열려있는 모든 문을 열어서 들어가 보고, 모든 계단을 오르내리고, 모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 이상 탄 것 같다. 관람을 마친 우리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전시실을 둘러본 사람들 못지않게 흥분된 것이다. 이날 나는 “남편 따라오길 잘했네!”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건물을 깊이 있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특이한 외관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쾌적하고 편리한 동선과 좋은 경험을 안겨주는 공간이었다. 루이비통의 가방은 예술품이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만든 미술관은 진짜 예술적인 명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이날만큼은 그림을 보지 못한 것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인연이면 또 만나지겠지! 건물 바깥에서 충분히 여유롭게 구경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지만, 그 또한 인연이면 또 가게 되겠지!
다시 로비로 내려오는데, 로비의 카페 테이블 위로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물고기 조명이 유영하고 있다. 프랭크 게리는 마치 움직이는 것 같은 동적인 느낌의 건물을 만들고 싶어서 물고기의 움직임을 다양하게 관찰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거장이 만든 명품 건물에 남겨둔 그의 사인으로는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 게리의 걸작을 완전정복하지 못한 아쉬움을 넣어둔 채 어느새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파리로, 센 강으로, 에펠탑으로, 얼마 남지 않은 파리의 밤공기를 마시러 달려갔다.
* 루이비통 파운데이션의 건축과 전시와 공연 관람에 대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fondationlouisvuitton.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