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리의 잠 못드는 밤

필하모니 드 파리 Philharmonie de Paris

by Layers

겨울의 파리는 처음이었다. 시간과 비용이 빠듯한 여행객에게 해가 짧은 유럽의 겨울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가능한 계획이 세워졌다. 낮에는 남편이 원하는 건축물을 구경하고, 해가 지고 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기로 한 것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야간개장이 있는 날에 가기로 하고, 모처럼 남편과의 여행이니 반짝이는 센 강에서 유람선도 하루 타고. 그러다 보니 매일 10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여행 초반이라 시차적응이 안돼서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다음날 스케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건축여행이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파리. 문 닫을 때까지 미술관에 머물기. 화재 전의 노트르담


그날도 우린 아침부터 가열차게 걸어 다녔다. 지하철역에서 좀 떨어진 주거지역을 둘러보느라 오전 내내 헤매고 다녔고, 오후에는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보러 갔다가 저녁에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회에 가야했다. 이 저녁 스케줄은 우리 부부의 동상이몽이었다. 건축가 남편에게 중요한 것은 공연이 아니라 공연장이었다. 공연이 열린 필하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가 건축가 남편의 ‘투 두 리스트(to do list)’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왕이면 심포니홀 정도는 들어가 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나의 사심 가득한 제안을 그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 더없이 완벽한 윈윈 전략이었다.


2015년 문을 연 필하모니 드 파리는 파리 북동쪽 라 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 안에 있다. 라 빌레트는 원래 큰 도살장과 정육점이 대규모로 있던 곳이었는데, 1974년 마지막으로 도살장이 폐쇄된 후 황폐하게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재직 시절 추진했던 국립미테랑도서관,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라 데팡스 등과 함께 파리의 그랑 프로제(Les Grands Projets)의 하나로 1980년대에 공원으로 탈바꿈한다. 운하가 지나가는 라 빌레트 공원은 서울 하늘공원 두 배 정도의 크기인데 평지에 있어 그 규모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하철 라 빌레트역에서 나와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 워낙 넓고 여러 문화시설이 흩어져 있어서 서울의 올림픽공원역에서 나와 바라봤을 때의 막막한 느낌과 비슷했다


이제 겨우 여행 사흘째. 라 빌레트 공원 안에는 과학산업관과 극장, 파리음악원, 대중음악 콘서트홀, 그랜드홀, 음악의 도시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한눈에도 개성 넘치는 여러 건물이 가득했다. 오, 여기 뭔가 재밌는 게 많아 보인다. 우리가 가야하는 공연장은 저기인가? 하고 물어보려는 순간, 나란히 걸어가던 남편이 쌩 하고 달려 나간다. 어어, 하는 새에 저만치 앞서가 버린다. 처음 겪는 상황에 잠시 어리둥절 허둥지둥, 급히 따라가느라 사진도 흔들흔들이다. 금세 저 멀리 점이 되어버렸다. 너무 빨리 사라지니 포기는 쉬웠다. 난 그냥 내 속도로 천천히 구경하면서 가야겠다. 뛰어봤자 저 건물에서 만나지겠지. 이제 겨우 여행 사흘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여행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phil-03.jpg 점이 된 그대



문제의 건물, 필하모니 드 파리는 멀리서부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반짝이는 것의 정체는 새 모양이었다. 새를 패턴화해서 건물 바깥을 완전히 회색의 새떼로 덮어놨다. 몇 가지 패턴 조각을 연결했는데 복잡하게 생긴 건물 전체를 덮으면서 아귀가 딱 맞게 하려면 고생 깨나 했을 것 같다. 건물이 워낙 독특한 모양이라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건물의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계단을 올라가서 옆에서 본 필하모니 드 파리. 바닥까지 모두 같은 모양의 패턴으로 뒤덮여 있다. 원래는 회색 톤의 조각들인데, 지는 햇빛에 황금색으로 반짝인다


새가 반짝이며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 아련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자꾸만 고개를 높이 들어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이 새 패턴, 어쩐지 좀 낯이 익다.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던 건축가 남편이 슬쩍 힌트를 주고 간다.



phil-06.jpg 작품이미지 출처는 에셔의 공식사이트 http://www.mcescher.com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 네덜란드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작품들. 에셔는 새나 물고기, 동물 등 알아보기 쉬운 형상들로 평면을 대칭 배열해 전체 패턴을 구성하는 테셀레이션(Tessellation) 작업을 통해 다양한 패턴을 탐구했다.


새 모양의 패턴과 함께 필하모니 드 파리 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간에 있는 거대한 똬리 같은 것이었다. 똬리의 무늬라고 생각했던 것은 길쭉한 금속판을 바구니처럼 엮은 것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떤 부분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아마 라 빌레트 공원을 조망할 수 방향은 실내에서 볼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어두워지면서 실내에 불이 켜지니까 안이 비치면서 구조가 더 잘 드러난다. 안에는 직선의 건물이 있고, 그 바깥쪽에 금속판을 모양대로 엮어서 씌워 놓은 것이다.


똬리 아래쪽에 심포니홀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구멍이 뚫린 부분은 얇은 커튼을 친 것 같다. 금속판에 그러데이션을 주어 자연스럽게 투명해졌다가 불투명해진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부터 해가 지려고 하자 건축가 남편은 숨도 안 쉬고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다니면서 둘러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도 말 걸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혼자라도 좀 쉬면서 앉아 있고 싶어도, 1월초 사방이 뻥 뚫린 공원에서는 차라리 걸어다니는 게 덜 추웠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힘드니까 대충 보고 말아야지’라는 생각과는 달리 구석구석 보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필하모니 드 파리 입구를 지나 건물을 돌면 라 빌레트 공원을 내려다보는 레스토랑이 있다. 레스토랑 쪽 처마 밑으로 지붕에서 내려온 새 모양 패턴과 오른쪽 금속 바구니 패턴이 만나는 곳도 섬세하게 그러데이션을 주었다.


처마마다 빼곡하게 달려있는 뾰족뾰족한 침도 인상적이었다


건물 뒤편에 있는 지그재그 모양의 경사로를 따라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라 빌레트 공원이 한눈에 보이는 옥상 전망대다


그렇게 폭주하듯이 해가 거의 넘어갈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둘러봤는데도 아직 5시 남짓이다. 몸도 녹일 겸 옆 건물에 있는 카페로 간다. 옆 건물, 시테 드 라 뮈지크(Cité de la musique. 음악의 도시)는 필하모니 드 파리 이전에 메인 공연장이었다. 지금도 이곳의 공식명칭은 두 건물을 아우르는 <The Cité de la musique-Philharmonie de Paris>이다.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Christian de Portzamparc)이 설계한 음악의 도시. 라 빌레트역에서 필하모니 드 파리로 가는 길에 오른쪽으로 길게 놓여 있다. 옆에서 걸어가면서도 저절로 눈길이 가는 건물이었다. 원형경기장에서 영감을 받은 콘서트홀과 음악박물관 등이 위치하고 있다.


해도 졌고, 음악의 도시에서 뭔가 더 보기엔 거의 방전상태였다. 1층 카페 구석에서 방전된 심신을 추스르고 큰길을 건넜다. 파리음악원과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문화시설이 모여 있다 보니 근처 카페테리아들도 가볍게 들뜬 분위기다. 비록 ‘프랑스도 유동인구 많은 동네의 길거리 음식점은 똑같군!’이란 생각이 드는 맛이었지만.



조명을 받은 필하모니 드 파리는 아까보다 화려하고 들뜬 느낌이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번 빙글빙글 타고 올라가면 심포니홀 입구가 나온다. 천장에 박아놓은 핀들이 낮에도 예뻤지만, 조명이 들어오니 꼭 샹들리에를 달아놓은 것처럼 반짝거린다.


phil-13.jpg


공연까지는 30분 남짓. 건물에 들어가서도 또다시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내리고 모퉁이를 돌아 구석구석 필하모니 드 파리 탐방이 시작되었다. 실내에서도 천장에 눈이 갔다. 작은 금속 조각인지 플라스틱 조각을 천장에 가득 매달아 둔 것이 팔랑거린다. 조명이 부드럽게 일렁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위층 로비는 천장을 물결치는 갈빗살처럼 곡선 프레임을 씌워 놓았는데 꼭 악보의 오선 같기도 하고, 리듬감이 느껴져서 음악회장과 어울렸다.


다만 규모에 비해 로비가 좁은 편이고, 천장도 서울의 대극장에 비하면 많이 낮아서 사람이 많으니 답답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한겨울이 아니라면 공연 직전까지 바깥바람을 쐬다가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메인 로비 바닥에는 건물 바깥에서부터 새 패턴이 이어져 있다. 천장의 조각들은 몇 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공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左) 바깥의 금속을 바구니처럼 엮은 부분을 안에서 보면 이렇게 보인다 (右) 갈비 모양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위층 객석 로비의 천장


그런데 필하모니 드 파리를 설계한 장 누벨(Jean Nouvel)은 파리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이 건물에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예산 초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고, 완공식 때도 마무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계 원안대로 지어지지 않았다며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파리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프랑스 문화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건축에 대한 모욕이자, 전문성에 대한 모욕이며, 건축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는데 결과는 장 누벨의 패소로 마무리됐다. 설사 그가 이겼다고 해도 이렇게 개성적인 건물을 디자인해놓고 서류에서 이름을 뺀다고 장 누벨의 이름이 없어지거나 잊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제 공연 시작 15분 전, 드디어 공연장에 들어선다.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간은 아무래도 이곳, 심포니홀일 것이다.







이미지는 필하모니 드 파리-음악도시 공식 홈페이지의 인포그래픽

https://philharmoniedeparis.fr






2400석 규모의 심포니홀은 아주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연장이 아니라 무대장치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마치 구름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몽환적이다. 무엇보다도 객석의 배치가 일반적인 로열석의 통념을 깬다. 오히려 양쪽 측면이나 무대 뒤쪽 합창석이 더 좋아 보이기도 한다.


필하모니 드 파리는 처음부터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음악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무대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설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멀리 있는 좌석도 지휘자와의 거리가 32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2400석이면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 정도 규모의 대극장인데 겨우 그 정도 거리에 객석이 모두 밀집해 있다니! 좌석이 조금 좁은 듯하긴 했지만, 공간이 그렇게 좁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말이다.


phil-17.jpg


음향을 위해서 내부 설계는 음향학자와 공동으로 작업했다고 하는데, 벽면의 작은 사각형 조각이나 홈들, 소리가 반사되는 곡선들은 아마도 그 결과일 것이다. 굉장히 섬세하고 도전적인 작업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공연장 내외에 여러 가지로 공을 많이 들였으니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장 누벨의 아쉬움이 컸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이런 공간이 실현되어 있고, 직접 이곳에 와서 공연을 본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러나 때는 시차적응이 끝나지 않은 강행군 여행 3일 차. 가장 피곤한 날 저녁의 클래식 공연은 좀 힘들긴 했다. 허벅지를 아무리 꼬집어도 아다지오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미안해요 바렌보임. 그래도 이곳에서는 관광객이 보이지 않아서 진짜 파리지앵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동안 그들의 삶과도 더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아름다운 덤이었다.


파리의 주말 밤. 서울에서처럼 늦은 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센 강을 건너는데 저 너머 반짝이는 에펠탑의 불빛에 피곤함이 싹 가신다. 이 설렘의 힘으로 우리는 내일도 걸을 것이다. 하루 종일.


phil-19.jpg


*필하모니 드 파리의 건축과 공연에 대한 정보와 예매는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https://philharmoniedeparis.fr



keyword
이전 09화차갑고 맑고 따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