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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스토끼 Nov 11. 2019

피르스트 펀 패키지 그리고 맥주

스위스 입성


 이전 두 번의 여행에서도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다는 생각에 쉽사리 코스에 넣지 못했던 나라였다. 하지만 한 번 다녀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스위스. 메뚜기 생활을 하느라 고됐던 이탈리아를 뒤로하고 거진 7시간의 긴 여정의 끝에 그린델발트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를 찾기는 꽤 어려웠는데, 메인 길이 아니라 역의 뒤편 길로 갔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우리의 숙소는 <융프라우 롯지> 크리스탈 아넥스 별관이었다. 가성비와 아이거 뷰를 모두 잡은 최적의 숙소였다. 


 

출근 전 아침마다 오늘의 미세먼지 수치는 얼마일까 걱정하던 한국과는 달랐다. 최악이라고 까만색 방독면 가스 그림이 뜨는 것을 보고도, 제대로 나의 호흡기를 보호해줄지 모르는 마스크를 최소한의 방어막으로 사용하며 문을 나서던 그런 날들. 서울의 밀도 높은 건물들이 아니라 1, 2층 정도의 작고 아담한 집이 널찍한 간격으로 위치해 있어 아이거 북벽까지 어느 방해를 받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동화 속 마을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우리의 숙소는 아마도 겨울에는 스키어와 보더들을 위한 콘도로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정갈한 싱글 침대 두 개가 붙어있었고 발코니로 나가면 아이거 북벽이 보였다. 이 발코니는 참으로 낭만적이었다. 전날 제노바의 까르푸에서 사둔 바롤로를 꺼내고, 캠핑 램프와 컵밥까지 곁들이니 남부럽지 않았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거 북벽에서 반짝거리는 불빛들을 함께 보았다. 어둠이 찾아오면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왜 불빛이 반짝였을까. 아마도 아이거 북벽을 등반하는 탐험가들의 불빛이었으리라. 


 

술 문화에 대한 고찰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며 무척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술 문화였다. 첫 번째로 이상했던 것은 신입들이 윗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었다. 나는 소위 대학시절 미팅에서도 게임에 걸리면 술을 마시고 하는 것이 싫어 나 혼자 술을 마셨다. 또한 윗사람(선배)을 위해 술을 따라본 경험이 없었다. 친구들과의 신나는 술자리에서야 서로 주거니 받거니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가능하다만, 사회생활에서 강제적이기까지 한 그 분위기를 이길 수 없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돌아다니며 술을 따르기를 권했고,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술 따르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노라며 혼자 분노했다. 이것은 비단 여성/남성의 문제는 아니다. 상하관계, 권력관계의 문제의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신입이라면 으레 윗사람에게 굽실거려야만 예쁨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예쁨을 받아야 사회생활이 편해지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의 무한루프 속에서 사회 1-2년 차에는 고민이 많았다. 미안하지만 내 동기들은 그렇게 해서 아주 단시간 내에 예쁨을 받았고 나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캐릭터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결국에는 주어진 일은 하는 사람으로 나중에는 알아주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이상했던 것은 잔을 돌리는 문화였다. 왜 당신이 주는 잔을 받아야만 나는 충직한 후배이며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인지. 꼰대 문화를 처음 접한 꼬꼬마 신입은 잔에 입을 대지 않고 술을 털어먹거나 완곡한 거절의 표현으로 그 시간들을 넘겨야 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화. 

 세 번째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폭음이다. 나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우리 민족은 한이 많아서일까. 술을 많이 마셔서 잊고 싶은 것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폭음하고 그 전날의 실수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웃어넘기면 그만인 날들. 

 여행을 다니면서 술을 마시는 시간들은 위에 언급했던 그 문화들이 없어서 좋았다.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냐 물으면 그것 또한 맞다고 대답하고 싶다. 다만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사람들을 보지 않아 좋았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마시고 싶은 만큼을 마시고 싶은 속도로 마시는 것이 참 좋았다. 

 술이란 것이 참 그렇다. 좋으면서도 항상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술을 권해야 하는 위치에 간다면 꼰대처럼 굴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며 나도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내 경험을 줄줄 외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위의 세 가지는 금하는 멋진 인생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다. 여하튼간에 내가 먹고 싶은 만큼 좋은 사람들과 하는 술자리는 언제든 만사 오케이다. 피르스트 정상에서도 그랬고. 



피르스트 정상에서 


 피르스트에 가는 날은 참으로도 화창했다. 이때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이 선크림이었는데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자외선이 강한 탓에 선글라스, 반팔로 차단한 곳 이외에는 모든 곳이 다 타버렸다. 피르스트 펀 패키지를 끊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오스트리아 커플과 함께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내 여행 메이트 및 오스트리아 커플은 스키장으로 단련되어 그런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게 끝일까 싶은데 더욱더 위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도착한 피르스트 정상은 무릉도원 같았다. 스위스는 정말이지 꼭 다시 한번 가고 싶은 나라이다. 단독으로라도 갈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보는 모든 뷰들이 사진 같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구름이 살풋 낀 피르스트의 정상에서 뭘 할지 고민하다 클리프 워크를 가기로 했다. 나는 한 발자국을 못 떼고 포기를 선언했다. 정말로 아래가 훤히 보이는 그곳을 차마 걸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옆으로 일본인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클리프 워크를 가는데 아빠가 아기띠로 한 명, 두 명을 걸려 그곳을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3명의 유아를 데리고 피르스트를 왔다는 것에 1차 충격을 받았고, 아이들이 해맑게 그곳을 지나가는 것에 2차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아기가 생기면 꼭 주저하지 않고 오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냥 짚라인을 타기에는 아쉬워 롯지처럼 보이는 휴게소에서 맥주를 먹기로 결정했다. 안의 매점에서는 병맥을 팔고 있었고 그 옆의 바에서는 생맥을 팔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슈니첼을 시켜 맥주를 마셨다. 펀 패키지의 첫 번째 코스인 짚라인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은 길지도 않은 주제에 1.5시간이 걸린다는 팻말이 떡하니 서있었고, 날씨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래, 안갯속을 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 위안하며 기다리는 와중 뱃속에 들어간 맥주 탓에 자꾸만 화장실을 가고 싶어 졌다. 우리 여행은 늘 이런 식이다. 계획 속의 즉흥. 하이킹을 하려고 했던 계획 대신 맥주를 택한 것처럼. 

 


우리는 운명일까

 

 한 시간 반을 기다린 짚라인 줄에서 우리가 탑승할 즈음 안개가 걷혔다. 피르스트 너와 우리는 운명이었을까. 안개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은 조급해했던 내 마음을 알아준 것처럼 구름이 걷혔다. 그 덕분에 뻥 뚫린 피르스트를 만끽하며 짚라인을 즐길 수 있었으니. 

 나는 매사에 조급하면서도 계획적이다. 이 두 가지 수식어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나를 표현하기에는 참 알맞다. 내 신랑은 나의 이런 면을 처음부터 알았다고 한다. 나라면 정이 떨어졌을 법도 한데 그에게 이런 나의 모습은 귀여워 보였나 보다. 우린 운명이었을까?   

 나는 사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딱 한순간 있다. 내 마음만큼이나 조급한 것은 걸음이었다. 남들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가서 뒤쳐진 동행들을 얼른 오라고 손짓하길 여러 번이다. 엄마는 내게 다른 사람과 발맞춰 걸으라며 훈계 아닌 훈계를 하였지만 빨라진 걸음은 쉽사리 늦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내 걸음이 빠르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 드디어 내 짝을 만났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신랑은 내게 걸음을 맞춰준 것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나와 걸음걸이가 맞는 사람을 찾았노라며 무척이나 기뻐했었는데. 슬쩍 머쓱해졌다. 

 우리는 운명일까? 내 단점까지도 웃어 넘겨주는 그를 만나며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나를 둘러싼 많은 환경들로 인해 자존감이 무척이나 떨어져 있던 내게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얘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준 덕분에 나 스스로도 내가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그와 함께하는 유럽여행이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여행이 즐거운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웃음이 나는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동행이 그이기 때문이리라 확신한다.  



 사륜 바이크와 트로티바이크를 타고 내려온 숙소에서 치킨과 함께 마시는 맥주는 또 꿀맛이더라. 스위스에서는 이탈리아에서의 번잡함과 바쁨을 뒤로하고 여유를 찾기로 했다. 일찍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마을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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