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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Aug 03. 2022

폭염 끝에 물폭탄

1994년 추억


밤새 빗소리가 귓가를 세차게 두드렸다. '타닥 타탁 탁 탁' 목탁소리인지 정열적인  댄스 소리인지 모를 일정한 박자의 강한 데시벨의 울림이 아침까지도 멈출 줄을 몰랐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비를 좋아하니까. 아니 가만 생각해 보면 빗소리를 좋아하나 보다. 하지만 비가 오면 조용하 재즈 음악이나 들으며 커피나 마실 것이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흥분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던 내 모습이 만들어낸 추억은 한둘이 아니다.


신혼 생활을 성남에서 시작했다. 약진로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면 오른편에 우뚝 서있는 주공아파트였다. 1207호에서 깨를 볶으며 아이와 함께 스위트 한 날들을 보냈다. 무엇을 해도 달콤하던 때였다. 토요일도 해 질 녘에야 회사 문밖을 나올 수 있었던 젠틀하지 않는 조직문화에 자리를 뺏긴 주말에도, 부모님이 계신 수유리에 거의 매주 방문을 해야 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에어컨도 없는 1994년의 혹독한 이상 고온(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낮기온이 33도를 넘는 폭염일수가 29일로 기록)에 땀범벅이 되어 아이를 들쳐 엎고 온갖 집안일을 해도 그 시절이 자꾸 생각난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주말에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비문명 지역인 성남을 벗어나 문명 지역 분당의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28살 동갑내기 신혼부부의 당연한 선택지였으리라. 그 당시 우리 분에는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도, 해지는 먼산 붉은 노을의 경이로움보다는 쇼윈도의 화려한 조명을 받은 백화점 상품들이 눈에 팍팍 들어왔다.


아마도 그날도 백화점으로 향하는 아침나절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리 걱정할 만큼의 거센 모양새는 아니었다. 삼성플라자 중앙무대에서 열린 가수 김수희 님의 열창을 들을 때 가사를 음미했어야 했다 "비 내리는 호남선..."


그녀를 먼발치에서 끝까지 지켜본 후 개포동 처형네로 향하는 분당 수서 도로에는 앞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양동이로 퍼붓는 듯한 물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급기야 고속화도로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저지대에서는(그때까지는 그렇게 낮은 곳인지 몰랐다) 점점 불어나는 고인물이 자동차의 바퀴까지 차올랐고, 꽉 막혀있던 앞의 차량들이 차를 버리고 탈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 문을 간신히 열어서 아이를 가슴 높이로 받쳐 들고 차를 버리고 삼성서울병원 못 미쳐 있는 구릉지역으로 피신을 시키고 경계 화단을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차를 용케 빼내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비는 여전히 폭포수

같이 내리고 있었고 우리 부부는 마음은 마치 모세의 기적을 통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의 심정으로 몸은 쇼생크 탈출을 한 주인공 앤디 듀프 레인이 되어 있었다.


밤새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친 오늘 아침, 차를 몰고 회사를 향하며 억수 같은 비를 헤쳐 나와 주차장 옆 단골 커피숍 주인의 햇살을 닮은 미소와 에스프레소 한잔을 접하고 나니 한 편의 영화같이 삼십 년 전 그날이 생각난다.


전무후무한 살인적 무더위와 쇼생크 탈출의 젖은 추억이 어우러진 1994년.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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