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가을이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두꺼운 다운재킷을 입기는 좀 그렇고 해서 가죽재킷을 즐겨 입는다.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다. 어제 가죽 재킷을 입고 아내와 산책을 하는데 한눈에 얼룩이 두드러져 보였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얼굴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얼룩 탄생의 비화를 밝혔다.
몇 해 전 11월 어느 오후 다른 이의 차 뒷자리에 몸을 싣고 어디를 다녀오는데 너무 피곤해서 졸다가 침을 흘렸다고 한다. 선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황급히 물티슈로 박박 문질렀는데, 그래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가죽이 물에 젖은 듯이 얼룩이 생겼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독백) '결혼 30년 차가 되니 이제 침 흘리며 잠들어 생긴 이야기도 서슴없이 하는구나. 좋은 거지 뭐~, 그래도 나 같으면 차에서 가죽옷에 침까지 흘리며 잠들지는 않을 거 같은데 말이야.'
(실제) "아, 그랬구나, 그날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렇게 스스럼없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산책하던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어김없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내가 새벽 두 시쯤 적어놓았을 법한 쪽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늘 아침은 밥과 (육거리 시장에서 산 아주 맛있는... 이 부분은 쓰여있지는 않지만 들리는 것 같았음) 김자반, 계란 프라이 간장 비빔밥을 해 먹고 가'
따듯한 밥, 계란 반숙과 간장 그리고 참기름... 이 보다 간단하지만 완벽한 조합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지구 반대편에 빵과 버터, 햄 조각 조합이 있겠지. 절묘하고 익숙한 조합을 쓱쓱 비벼먹고 출근하는 길에 회사 앞 커피숍에서 '뜨아' 한 잔을 받아 들고 회사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걷다가 흘릴까봐 에스프레소를 받아서 회사에 와서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시는데, 이 날따라 가끔 주문하는 호주 스타일 물 80%만 부은 찐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것도 아니고, 100% 노멀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왜냐하면,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해서 커피를 든 손에 온기를 전해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계를 낀 왼 손으로 커피를 들었으며 왜 하필이면 몇 시인지 궁금해했는지, 몇 시지? 하는 순간 뜨거운 커피가 가죽재킷의 앞섶으로 쭈르륵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바보가 따로 없구나 싶었다. 커피를 든 손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바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고 있었으니 '너 네들이 한 몸에 있는 거 맞니?' 하고 말하기에는 이미 둘 다 내 것이다. 타인의 노화과정을 관대하게 품어주는 노력, 나의 노화과정은 더 따듯하게 안아주는 노력이 필요한 56세(신경숙의 '외딴방'을 읽으신 분은 주책맞게 나이를 함께 쓰는 표현이 이해가 가실듯. 56세 나를 새삼 자각하고 나이를 붙여서 나를 말하게 됨)의 일상이 오늘도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