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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Aug 26. 2024

화양연화(花樣年華)

조그만 일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뭘 해도 안 되는 그런 날이 있지. 

적어도 오늘 아침에 눈 뜨고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벌어진 일은 그랬어. 마치 삼십 분이 넘게 모든 사거리 신호등이 빨간불, 대기만 알려주는 것을 운전석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야. 정말 그런 날이 있지. 미칠 것 같았어.


지난밤은 34일 동안 전 국민의 꿀잠을 빼앗아간 열대야가 0.5도 차이로 고개를 숙인 날이었지. 하지만 네이버 클로버 시계에 나타난 미세먼지를 알리는 컬러는 강렬한 레드였어. 그동안 해왔던 대로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 놓고 선풍기에 의지해 잠을 잘 수 없다는 거야.  


밤 새 틀어놓은 에어컨 : 차마 미세먼지를 들이마시며 잠을 잘 수가 없어서 58년 인생 최초로 에어컨을 켜고 잠자리에 들었어. 이것도 에어컨 직빵은 피하기 위해 거실에 에어컨을 켜고 각자의 방문을 열어둔 채 방에서 자는 방식을 택한 거야. 좋기는 하데... 뒤척임 없이 꿉꿉한 느낌 없이 바로 잠든 것 같아.


달콤하게 자다가 날이 밝아 5시 좀 지나 온몸으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아 드디어 가을이구나, 지긋지긋한 여름이 이제 끝났구나' 하면서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알람 소리를 기다렸어. 잠이 반쯤 깬 상태에서 자명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왜 이렇게 달달한지 말이야. 참 오랜만에 기분 좋게 일어났는데. 거실에 나가보니 에어컨 소리가 탱크가 지나가는 것 같이 크게 느껴지는 거야. 당혹스러웠어. 한반도는 아직도 폭염 속에서 헤어나질 못핬다는 사실이. 귀뚜라미 울어대는 가을은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잔디밭에 들어가는 것 같은 심리적 불편함 : 그보다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았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와닿았어. 나와 와이프는 전기료 부담보다 심리적으로 에어컨을 오래 틀어놓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 같아. 퇴근하고 마주친 하루 종일 켜져 있었던 목욕탕 전등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야. 마치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와 같다고 생각해. 잔디에 함부로 들어가면 큰 일 날 것 같은 그런 느낌. 약간의 불편함을 견뎌내면서 에너지를 절약해야만 애국 시민인 듯한 그런 느낌.


닫혀있는 주차장 : 월요일에 분당 수서 도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7시 이전에 집을 빠져나와야 했지. 분당 가는 도로에 차를 올리고서야 7시에 시작하는 이재후 아나운서의 '출발 FM과 함께'를 들었어.


“현명한 사람은 넘어질 때마다 무언가를 쥐고 일어납니다.”- 랠프 팔레트

파리 올림픽 때문에 한동안 듣지 못했던 이재후 님이 읽어주는 오늘의 한마디를 들으며 부웅~하고 자동차 액셀을 밟았다.


무사히 회사에 도착했지만 평소 주차하는 도서관이 아니라 회사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려면 차단봉을 올리는 리모컨이 필요했어. 지난 금요일 함께 필드를 뛰어다닌 후 내 골프클럽과 보스턴백을 싣고 있는 C가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게 순서인데, 전화를 안 받아. 그래 아침 7시 15분인데 당연한 거지. 내가 너무 깝치는 것 같아. 그래서 회사 앞 행정복지센터에 차를 잠시 파킹해 놓고 FM을 들었어. 2024년  8월 26일 월요일 아침. 시간이 참 느리게 흘러가네.


배송되지 않은 커피 드리퍼 :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싫어서 도서관 지하에 차를 파킹하고 있는데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C로부터 전화를 받았어. 늦잠을 자서 50분 후에 도착한다고 했어. 그래, 그러면 회사에 새벽 배송을 주문한 커피 드리퍼와 서버를 뜯어서 '예가체프 아리차'를 드립 하려고 했어. 그런데 회사 출입문에는 내일 S시에 싣고 가야 할 보고서 박스만 우두커니 앉아있더군. 허리 아픈데 낑낑대면 출입문 안쪽으로 박스를 옮겨놓고서 쿠팡 배송현황을 보니 새벽배송이 오후쯤 배송으로 변경되어 있었어.


'젠장 오늘은 뭐 되는 게 없네'


그래도 화양연화의 시간 : 지난 2시간 반 동안 있었던 일을 늘어놓자니 돌아갈 구멍을 잃어버린 두더지 마냥 투덜대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난다.


난 생 처음 에어컨 냉기를 느끼며 시원하게 잠을 잘 잤고, 닫힌 주차장 앞에서 FM을 잘 들었고, 서버나 드리퍼가 없어도 즉석에서 간 원두를 여과지에 잘 내려서 최고로 맛있는 커피와 함께 호젓하게 사무실의 월요일 아침을 즐긴 거다.


게다가 나는 아직 특별히 몸이 불편한 데가 없고, 골프 스코어는 형편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고, 자전거 페달링 속도도 꾸준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와이프도 골골하면서 특별히 밤잠 못 이룰 정도로 아픈 데는 없어서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화양연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젠 우리 앞에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  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花: 꽃 화樣: 모양 양, 상수리나무 상年: 해 연, 해 년, 아첨할 영, 아첨할 녕華: 빛날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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