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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Jan 23. 2024

그믐달

쉰두 번째 시

2023. 4. 24.

이정록, ‘그믐달’

시집 <어머니학교(2012, 열림원)> 중에서


[그믐달]


가로등 밑 들깨는

올해도 쭉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거지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지나고 봐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아녔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어르신들 말씀은 가끔 그대로 시가 됩니다. <어머니학교>는 시인의 어머니와 시인이 함께 쓴 시집이라고 해요. "우리는 모두 어머니학교의 동창생입니다."라는 시인의 말이 참 정겹고도 묵직합니다. 제가 어머니학교의 학생임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린 시절 제게 엄마는 온 우주였고, 조금 크면서는 벗어나고 싶은 자기장 같은 것이었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엄마는 친한 정원 [친정(親庭)] 같은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엄마라는 영토는 그렇게 제게 한없이 넓었다 줄어들었다, 저를 밀어냈다가 끌어당겼다가 하면서 저를 만들었지요. 지금 그분은 다시 저의 잔잔한 우주이고 다시 들어가고 싶은 자기장이에요.

   너 같으면 열도 키웠겠다, 네가 뭔가 사고를 치고 오는 날을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이 없더라, 하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에게 저는 어머니학교의 우등생이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자기가 어머니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오만한 학생이었음을. 다 안다고 적어놓지도 않았던 강의 노트를 뒤늦게 펼쳐 뭐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늦깎이 학생임을요.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시-어머니학교 10」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목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사그랑주머니-어머니학교 1」


   이런 말들을 시로 받아 적어 시집을 낼 수 있었던 시인이 부럽습니다. 한국에 가면 꼭 찾아 구입하고 싶은 시집이에요. <그믐달>이라는 이 시는 힘겨워하는 자식에게 건네는 어머니의 말이었던 모양입니다.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달이 환한 추석날 먹는 송편은 반달 모양이지요. 둥근 보름달이 뜨는 날에 왜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는지 궁금했던 어린 제게, 아빠는 삼국사기에 들어있다는 옛날이야기를 일러 주셨습니다. 보름달은 어김없이 기우는 달이지만 반달은 비웠다가 차는 달이라고. 송편 많이 먹고 한 해 한 해 보름달처럼 차오르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를 들려주신 건 아빠지만 그 이야기를 지금도 꺼내볼 수 있게 떡 찌는 냄새와 함께 몸속 깊숙이 담아주신 건 엄마였습니다. 시인의 어머니는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아녔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라고 말씀하시네요. 가로등 밑에서 잠도 못 자고 시달리는 쭉정이가 되지 말고, 어둠이 보약이니 푹 쉬어가라고.


   저는 사실 밤하늘에서 탄성이 절로 나오도록 예쁜 쪽은 보름달보다는 초승달과 그믐달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두 행성이 예쁘게 겹쳐 빛과 그림자를 모두 보이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을 닮은 것 같아서요. 시 속의 엄마와 아들일 수도, 연인일 수도 있을 그런 관계. 사랑은 빛과 그림자 모두를 끌어안는 일이니, 보름달을 보고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저희 엄마를 생각하자니 내가 엄마 주위를 공전했을까 아니면 엄마가 내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았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네요.  


   그믐달과 초승달의 모양이 늘 헛갈려 엄지손톱을 이용한 구분법을 애용하는 저로서는, 이 방법이 지구 북반구에서만 맞는 방법이라는 사실 앞에 또 겸손해집니다. 맞다고 믿으며 소리 높여 우기는 것들이 가끔은 네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 자리를 벗어나면 또 다른 진실이 보일 거라는 것. 아끼는 자식일수록 밖으로 내보내라며 어머니들이 자꾸 어머니학교 학생들을 '보다 큰 세상'의 유학생으로 만드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로마인들은 '달은 거짓말쟁이'라는 말로 그믐달과 초승달을 구분했다고 해요. ‘점점 작게’라는 뜻의 데크레셴도(Decrescendo)의 약자인 D와 닮은 달은 점점 커지는 달인 초승달이고, ‘점점 크게’라는 뜻의 크레셴도(Crescendo)의 약자 C와 닮은 달은 점점 작아지는 달인 그믐달이니, 달은 거짓말쟁이라는 거죠. 하지만 남반구에 사는 마오리족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달은 결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하겠죠?


   하지만 사실 이런 지식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지식의 영역보다는 지혜의 영토에 발을 담그는 쪽이고, 지혜의 땅이라기보다는 축복의 바다인 것을요.


   몸만 성하면 쓴다. 


   몸이 성치 못한 분들이 보시면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음이 아플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이 말은 그대로 두고 애써 고칠 필요 없는 '엄마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하자면 너의 존재 그대로 충분하다는, 그저 다 괜찮다는 그런 말. 전통적으로 어머니들은 살림을 하시는 분이셨죠.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또 외국에 있다 보니 '모국어'라는 세계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합니다. 모국어는 어떤 추상적이고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내 어머니가 뺨을 부비며 나에게 주신 모든 말들이라고 생각해요. 몸짓으로, 체온으로, 냄새로, 눈빛으로 가르쳐주신 언어들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머니학교에서 말부터 배운 셈이죠. 그렇게 배운 말로 엄마의 말들을 줍고 싶은데, 아무리 추억의 더듬이를 한껏 세우고 더듬어 봐도 주워 올리는 이삭이 신통치가 않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그 쭉정이 같은 알갱이들을 이야기로 하나씩 꺼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하는 일'이라는 롤랑바르트의 말을 마음에 품고요.


   엄마가 보고 싶은 밤입니다. 오늘 독일에는 촉촉하게 비가 내려 달이 보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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