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세 번째 시
2023. 10. 13.
김남조, '나무와 그림자'
시집 <심장이 아프다> 중에서
나무와 나무그림자
나무는 그림자를 굽어보고
그림자는 나무를 올려다본다
밤이 되어도
비가 와도
그림자 거기 있다
나무는 안다
며칠 전에 여섯 살짜리 저희 집 꼬맹이가 “엄마, 그림자는 왜 있어?” 하고 묻더라고요. 과학자에 빙의하여 빛이... 물체가... 설명해 줘도 못 알아듣는 눈치길래 그냥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림자가 있으면 뭐가 좋아? 좋은 게 없잖아.” 하더라고요. 속으로 '이 녀석, 그 나이에 벌써 세상 만물의 기준이 효용이라니. 쯧쯧.' 하면서 “여름에 그늘 있으면 시원하잖아. 세상에 빛만 있으면 너무 덥고 눈부셔. 이음이 심심하지 않게 그림자가 맨날 따라다녀 주고. 그리고 밤에 그림자 놀이 하면 엄청 재밌잖아!” 했거든요. 그러면서 저도 느꼈어요. 그림자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대체로 부정적인데, 알고 보니 얘 너무 좋잖아?
'누군가의 어두운 그늘'이거나, '실체가 없는 어둠에 불과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림자는 힘을 잃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내 곁에 항상 있는 것, 밤에도 빗속에도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림자만큼 묵묵히 힘이 되는 존재도 없네요. 내 인생에 가장 어둡고 젖어 있는 순간, 내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나의 그림자는 거기 있다는 사실은 뭉클하기까지 합니다.
평소에는 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나를 앞에 뒀는데, 내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반드시 거기에 있을 그림자 덕분에 오히려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실체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어둡고 축축하게 젖은 나의 곁에서 쉽사리 도망치지 않고 내 존재의 굳건함을 말없이 선언해 주는 그림자. 앞으로 우울할 때 내 그림자를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인간임을 선언하는, 나를 닮은 어둠.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보인다는 사실은 우리 일상에 늘 존재하는 바니타스 정물화 같기도 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지역에서 특히 유행했던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온갖 화려한 물건이나 음식과 함께 해골이나 모래시계 같은 죽음의 상징을 그려 넣어 삶의 공허함,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키곤 했죠. 인생은 덧없지만 그러므로 현재에 충실할 것. 마찬가지로 그림자는 가장 밝을 때 가장 진하게 우리 곁에 묵묵히 자리합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있어야 어둠도 있다는 사실. 삶에는 늘 죽음이 말없이 동행하고 있듯, 빛과 그림자는 늘 한 쌍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으니까요. 그림자는 그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라고 우리 곁에 붙어 다니고 있는가 봅니다.
다시 시(詩)로 돌아가니,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인간은 이런저런 볼거리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자유롭게 자리를 옮기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그림자의 존재감이 더욱 진할 것 같아요. 평생을 한 자리에 서서 묵묵히 서로를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둘의 관계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갱년기인가)
아이는 그림자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면서 자기한테 붙어 다니는 게 신기한가 봐요. “그림자가 꼭 엄마 같지? 엄마 마음도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데 이음이한테 꼭 붙어있어.” 했더니 멋쩍게 웃으며 저에게 주먹질을 하더군요. (주먹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타입)
밤이 되어도, 비가 와도 엄마가 거기 있다는 걸 꼬마 나무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