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네 번째 시
2023. 10. 4.
김은지, ‘종이 열쇠’
시집 <여름 외투 (문학동네시인선 193, 2023) > 중에서
잘 구분된 이면지가 담긴 상자가
책상 한편에
고유한 느낌으로 있다
커피의 쓴맛 속에서 초콜릿과 견과류를 느낄 수 있게 되듯
이면지를 좀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경우에든 다시 쓰여도 괜찮은 허물없는 이면지
비밀을 갖고 있어 조심스러운 이면지
앞면이 너무 강렬해서 뒷면까지 채운 느낌인 경우는
손톱을 깎을 때 쓰기에 알맞다
뒤척이다가 일어나 아무렇게나 쓰는 꿈 묻은 말들
이면지는 잘 들어준다
이름을 봐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의 시를
이제 상자에 넣으려고 하는데
밝은 교실
어두운 창밖
사람들의 진지한 등
그 시를 읽었던 계절과 공간이
종이 한 장에 다
불려 온다.
이면지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잘 못 버립니다.
오래전에 천착했던, 시간이 지나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추억처럼 만나는 것도 좋고요. 반려인은 이런 일을 하는구나, 그가 하는 알쏭달쏭한 일을 A4 면적만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아이들이 삐뚤빼뚤 사랑스럽게 해 놓은 숙제들을 다시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가끔은 귀여워서 엄마의 보물상자로 직행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면지를 이렇게 말하네요.
다시 쓰여도 괜찮은, 허물없는, 비밀을 갖고 있는, 꿈 묻은, 잘 들어주는.
새 종이보다는 뭔가를 썼던 종이가 갖는 매력과 에너지와 힘, 여유 같은 게 있지요. 물론 그 매력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요. 사람도 비슷하지요.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의 매력과는 또 다른, 깊이 사랑해 본 사람만이 갖게 되는 색깔과 감각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청춘일 때는 아무리 귀에다 확성기를 대고 말해도 들리지 않던 것들이, 그간 내 인생에 뭔가를 썼기에 이제는 이해되는 시기가 오기도 하고요. 즉 백지상태일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내가 시간을 통과하면서 세상의 경험을 적는 이면지가 됨으로써 차차 잠긴 문이 열리듯 조금씩 안이 보이기도 합니다.
종이 열쇠라는 말이 참 예쁘죠? 백지는 그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어디로든 문을 열고 갈 수 있는 종이 열쇠가 되겠지만, 이면지는 그 한 장으로 그때의 시간과 공간이 다 불려 오기에 좀 더 특별한 열쇠가 됩니다. 백지가 미래의 시간을 연다면 이면지는 과거의 시공간을 연다고 할까요. 그 뒤에 현재와 미래를 다시 적을 수 있기에 더 특별하기도 하고요.
이름을 봐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의 시를 상자에 넣는 일이라니, 마음이 묘하게 출렁거립니다. 다소 슬프게 들리긴 해도, 설레는 마음으로 적어나갔던 누군가를 이면지로 만드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죠. 실은 꼭 슬프기만 한 일도 아니에요. 시를 상자에 넣는 형태의 매듭이라면 그 만남은 축복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매듭의 끈이 연인의 모양을 하고 있었든, 친구의 색과 질감이었든, 심지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끈이었든 간에요. 나는 한때 그로 인해 시를 썼고, 그 시가 온전히 상자에 담기는 형태라면요.
그 매듭의 모양도 상상해 보게 됩니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묶은 것도, 여러 번 묶었다 푼 흔적이 있는 것도, 울퉁불퉁 재차 묶어 커다래진 것도, 공예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것도, 언젠가는 풀고 싶은 마음에 느슨하게 묶어둔 것도, 어느 순간 불시에 잘려 나가는 바람에 남겨진 끈으로는 당최 매듭이 지어지지 않아 힘들게 어찌어찌 꼬아 둔 것도 있겠지요.
한때는 시였던 사람이 이젠 이름을 봐도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일, 한때 시였던 사람을 상자에 넣는 일. 그 종이 한 장에 지나간 시공간이 내 앞에 와르르 몰려드는 일.
그런 종이 열쇠, 가지고 계시나요? 저에게는 몇 장 있지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