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다섯 번째 시
2023. 12. 19.
황인찬,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무화과(無花果)는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겉으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안에 꽉 차게 담고 있는 녀석입니다. 무화과 열매를 갈라 보면 안에 붉게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안에 들어찬 꽃송이들이에요.
무화과를 먹을 때 톡톡 씹히는 씨앗이 바로 각 꽃송이에서 맺힌 열매랍니다. 그러니 밤톨만 한 무화과 열매 안에 얼마나 많은 꽃이 든 건지요. 우리가 열매라고 생각하는 저 둥근 보랏빛 껍질은 사실 꽃받침이라고 해요. 꽃을 안으로만 잔뜩 피우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살짝 마음이 저릿해지는 녀석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내 놓고 꽃 피울 수 없어서 내 속에만 꽉 차게 피우는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시였어요.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그렇게 아무 일 없는 듯이 살면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하루. 그 끝에 누워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줄기를 뻗어 꿈에서만 한껏 피우는 마음. 눈을 감으면 아무도 혼내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펼쳐지니까요.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라는 말이 얼마나 귀엽고도 슬픈지요. "옛날 일이다"라고 덤덤히 말하는 다섯 글자의 여운도 좋았습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옛날 일’이 있었는데, 저는 꿈을 꿔도 꼭 사랑한다고 혼나는 꿈을 꿨지 뭐예요. 온갖 반대의 은유와 질책의 의미로 가득 찬 꿈을 꾸고 나서, 꿈에서조차 내가 스스로 나를 혼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우스웠답니다. 그걸 시처럼 적어놓기도 했었죠. 그러고 보니 제게는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라는 공간이 글이고 시였나 봐요.
우리는 무화과를 비교적 최근에 먹기 시작했지만 서양에서 무화과는 아주 오래된 열매입니다. 성경 창세기 편에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서 몸을 가린 잎사귀가 바로 무화과 잎이라고 하죠. 그래서 그들이 따먹은 열매도 사과가 아니라 무화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성경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만 할 뿐 사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구약성경의 주무대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무화과가 무척 흔하다는 사실도 이 주장에 살짝 힘을 실어줍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천지창조에도 사과가 아닌 무화과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선악과의 이미지가 사과로 굳어진 것은 히브리어 성경이 그리스어 번역을 거쳐 제롬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될 때, 그가 라틴어로 언어유희를 구사한 데서 이유를 찾는다고 합니다. 라틴어로 ‘악(惡)’을 의미하는 단어가 malum인데요. 악의 형용사형인 malus와 사과나무를 뜻하는 단어 malus(이때는 a를 길게 장모음으로 발음한다고 합니다)가 같다고 해요. 원죄를 상징하는 과일로서 이렇게 딱 들어맞는 펀(pun)이 없었겠죠? 그 이후 1667년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장편서사시 《실낙원(Lost Paradise)》에서 선악과를 두 번이나 확실하게 사과로 명명한 점도, 대중의 머릿속에 '선악과는 곧 사과'라는 개념을 확산시켰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시를 두고 나무 설명이 길었네요. 어쨌든 최초의 인류가 먹었던 과일, 그로 인해 감정이라는 것이 시작되고 죄와 역사가, 인간의 삶이 시작된 과일이라고 생각하면 시의 맛이 묘하게 더 깊어집니다. 그렇게 따먹고 싶었던 그 사람의 마음. 그런 내 마음이 부끄럽고 왠지 죄스러워 안으로만 품던 시간.
안으로만 피운 꽃이 붉게 익어가던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밤에 눈을 감고서야 한껏 피웠던 마음도 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은 숲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쪼글쪼글 말린 무화과처럼 옛날 일이 되었네요. 그래도 입에 넣고 씹으면 달콤하게 톡톡 터지는 추억 알갱이들이 있죠. 앞으로 무화과를 먹을 때면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의 맛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말린 무화과도 좋지요. 빛바랜 달콤한 꽃송이들을 잔뜩 입에 넣고, 이제는 무엇이 터지는지 지켜보는 것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