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계절
물 한 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교 독서평설>에 시 읽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추워지는 계절에 한여름의 열과라니. 저의 게으름을 탓하며 8월의 시 올려둡니다. 예전에 써 놓은 글은 다시 보면 왜 이렇게 부끄럽고 못나 보이는 걸까요.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계절
[8월의 시] 열과(裂果)
-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에서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계절의 시인, 시인의 계절
저에게는 계절마다 떠오르는 시인이 있습니다. 봄은 기형도, 여름은 허수경, 겨울은 백석. 가을 자리는 후보자가 많은데 고르기가 어려워 아직 비워 두었어요. 시인들이 단 하나의 계절만 노래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시인의 시 증에도 어떤 시의 계절감이 유독 압도적인 경우가 있죠. 백석도 여름을 그려내고 기형도도 겨울을 썼지만 제게 백석은 겨울이고 기형도는 봄이듯이 말이에요. 누군가에게는 기형도가 가을, 허수경이 겨울일 겁니다. 어떤 계절이면 특정한 시인이 떠오르는 것은 함수의 이항관계 같은 거예요. 우리가 각자 마음에 품은 특별한 공식 때문에, 어떤 계절의 어떤 지표가 입력되면 ‘띠링-’하고 특정 시인이 대응되어 나오는 거죠.
잘 다니던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만주에 가서 시 100편을 가져오겠다’고 했던 백석의 시에는 먼 북방의 냄새와 흰 김이 서려 있고 푹푹 내리는 눈이 있어 아마 많은 이들이 그의 시에서 겨울을 느낄 겁니다. 저는 백석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흰 빛과 흰 눈, 흰 당나귀가 떠올라요. 슴슴한 흰 국수(눈 오는 날 먹었다는 이 국수는 아마 냉면일 거라고들 합니다)와 짭짤한 흰 소금도요. 성까지 ‘흰 백(白)’을 쓰는 시인이죠.
널리 겨울의 시인으로 꼽힐 백석과는 달리, 봄을 노래한 수많은 시인 중에 기형도가 봄의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다소 개인적입니다. 이 요절한 시인을 좋아했던 제 친구가 스물몇 해를 살고 병으로 요절한 때가 개나리 피던 봄이었거든요. 제가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도 봄이었고요. 하지만 이런 개인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기형도에게 충분히 봄의 자리를 내줄 수 있었던 까닭은, 신록이 번지는 생기 가득한 봄을 노래하기보다 가는 봄날의 쓸쓸함을 노래한 시인이기 때문이에요. 개나리로 죽음을 말하고 목련철을 감옥과 군대로 연결하는 그는, 찬란한 봄 안에서도 한숨과 비명을 잊지 않게끔 해주는 시인이기에 제 봄의 시인입니다.
이제 여름으로 가볼까요. 그간 저에게 여름은 허수경의 레몬 맛이었습니다. 시 <레몬>(『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맛본 여름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래, 여름이란 이런 거지’ 싶은 느낌을 주는 시인데, 여러분도 한 번 찾아서 읽어 보세요. 여름이라는 마법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시퍼런 빛과 더운 김, 상쾌한 달빛이 레몬 향 안에 촉촉하게 들어찬 시랍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어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라고 회상할 수 있는 짧은 여름이 있지 않을까요. 제게도 그런 무참한 여름이 있었기에, 끈적한 열기와 땀 냄새 위에 아린 레몬 향을 깔아준 허수경이 오랫동안 제 여름의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희연의 <열과(익으면서 갈라지고 터진 과일을 말합니다)>를 만난 이후 저의 여름 시인은 둘로 늘어났어요. 이제는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가 제 여름의 새로운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지요. 여름은 그런 계절이라고, 용감하게 여름을 껴안아 보라고 말하는 이 시에서 무덥고 맹렬한 여름을 날 힘을 얻습니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시집 이름입니다)을 헤아리는 시인에게 여름은 왠지 특별한 계절일 것 같아요.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여름은 어떤 계절인가요? 정신 차리고 미진한 부분을 보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땀 흘리며 앉아 있는 것이 고된 시간이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이 슬쩍 풀어져 바람이 통하는 시간이기도 할 거예요. 여러분은 여름이라는 시간을 주로 과거로 생각하는지, 미래로 상상하는지, 아니면 현재로 감각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여름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안희연 시인은 여름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여름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적의가 감춰져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풀과 나무들이 저토록 맹렬하게 자라날 수는 없다.”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현대문학 2019) 다른 시에서 시인은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고도 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여름은 고난의 계절인 동시에 맹렬한 성장의 계절이기도 한 거죠.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 줄까요? 흔히 노장사상에서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자연과의 합일’을 말할 때, 우리는 자연을 굉장히 보드랍고 순한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시끄럽고 경쟁적인 인간 사회를 떠나 고요한 자연의 품에서 은거한다고 생각하죠. 그렇지만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자연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연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고난일 겁니다. 식물들은 고요해 보여도 맹렬하고, 침묵하는 것 같은 숲은 실상 아수라장이죠. 특히 여름이란 ‘생(生)’의 시간이고 팽창과 통증, 그리고 탐험의 시간입니다. 열과라는 단어는 그런 여름을 상징적으로 담는 단어가 아닐까요.
시인의 말에 따르면 ‘적의’와 ‘맹렬’을 담은 단어인 여름. 여러분은 여름에 어떤 단어들을 연결시키고 싶나요? 우선 시인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여름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함께 들어봅시다.
한 손에는 태양, 한 손에는 장마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 그 사이의 먼지 낀 주름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합니다. 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극과 극의 서사 같은 것들 말이죠. 이 시 안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들어있어서 각 연마다 기쁜 마음으로 많이 머물렀습니다.
첫 연에서부터 시인은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똑같이 십 년씩 먹었더라도 휘둘리며 존재한 것과 힘주며 능동적으로 살아낸 것의 차이. 아마 그런 종류의 다름이겠죠. 여러분도 그냥 내게서 (혹은 내 주위를) 흘러간 것과 내가 주체적으로 보내준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물론 반드시 나의 의지가 들어가야만 좋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삶에는 그런 구분이 있다는 것, 살면서 그 둘을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다음으로는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의 구분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그 구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저는 왠지 울 것 같은 느낌이에요.
시인은 문지기를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사람인데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라니 신기하지요? 이 문지기는 아마 그냥 흘러가게 두기 보다, 잘 보낸 사람일 겁니다.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이 있는 이 문지기의 양쪽 주머니 안에는 열쇠와 자물쇠 대신 작열하는 태양과 장마가 들어있네요. 아니, 그게 바로 열쇠와 자물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열감과 습기는 생의 열쇠와 자물쇠 같은 것이니까요. 어느 쪽이 열쇠고 어느 쪽이 자물쇠인지는 좀 수수께끼 같지만요.
유대인 랍비인 부남(Bunam)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돌을 갖고 있어야 한다. 때에 따라 필요한 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오른쪽 돌에는 ‘세상은 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왼쪽 돌에는 ‘나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새겨져 있다.”(윤재윤, 『잊을 수 없는 증인』(나무생각, 2021)에서 재인용.) 인간은 그렇게 두 개의 돌을 번갈아 잡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아주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나. 우리는 사실 다양한 자아가 엉겨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사실 삶이라는 게 그 양쪽 돌 사이의 끊임없는 줄타기이기도 합니다.
저 문장을 읽고 나서 두 개의 돌이 든 호주머니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시를 읽고 나서는 양쪽 주머니에 작열하는 태양과 습기 가득한 장마를 넣고 걷는 옵션이 추가되었습니다. 돌들을 잘그락거려보는 것도 좋지만, 태양과 장마를 만지작거리며 걷는 느낌도 좋을 것 같아요. 두 개의 돌과는 살짝 결이 다르지만, 태양의 마음과 장마의 마음도 우리가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번갈아 갖게 되는 마음이지요. 뜨겁게 달구었다가도 소나기를 퍼부어 식히는 마음. 델 것 같은 뜨거움과 물크러질 것 같은 축축함, 그 벅찬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나도 아마 툭 터져서 열과가 될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열과가 되어보는 여름은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열과가 건네는 말들
열과는 앞서 말했듯 익으면서 갈라지고 터진 과일이에요. 쪼개졌기 때문에 상품성이 떨어진다고들 하지요. 온도와 습도가 크게 변동하는 경우에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열과라는 단어가 낯설어 찾아보다가 “갈라진 부분으로부터 과즙이 흘러나와 다른 건전한 과실까지 오염시킨다”라는 어느 농업기술센터의 설명을 보게 되었는데, 이 말이 참 묘하게 느껴졌어요. 과일 세상에도 ‘건전한’ 과실이 있고 그걸 ‘오염’시키는 과실이 있다니. 한 사회의 권력과 시스템이 어떻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지를 살폈던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얼굴이 슬쩍 떠올랐습니다. 인간들이 땅에 선을 긋고 자기들이 독점적으로 먹을 요량으로 과실을 재배하기 이전의 자연에서, 열과라는 건 전혀 열등한 무언가가 아니었을 텐데요. 오히려 껍질을 벌려 달콤한 속살을 드러내고 향기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더 많은 동물들을 불러들였겠죠. 특히 작은 곤충들에게 열과란 그저 황홀한 축제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므로 순환의 질서를 따르는 자연에서 열과는 흠도 아니고 오염원도 아니었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시장이라는 공간에 얽매인 인간들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상품성이라는 건조한 기준으로 바라볼 때, 아마 “건전한 과실”이라는 희한한 말이 탄생했을 겁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구절은 ‘욕심껏 쥐고 놓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이 부르는 파국’이라든가 ‘적절히 흘려보낼 줄 아는 자의 현명함’과도 맥이 닿겠지만 이렇게 '나를 조금 툭 터뜨려 보여주는 것, 그래서 타인(이를테면 동물과 곤충들)을 만나게 되는 일’과도 썩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를 훔쳐가도 좋다고 말하는 그 마음. 그렇게 너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
열과와 비슷하게 ‘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을 이르는 ‘파치’라는 단어가 있어요. 이 단어도 과일에 많이 쓴다고 해요. ‘열과’는 ‘과(果)’ 자가 끝에 당당히 붙은 모양이 ‘그래도 나는 누가 뭐래도 과일이야’라고 말하는 느낌이라서 좋고 ‘파치’는 어감이 매력적이라 괜히 좋습니다. 파치, 하고 발음해 보면 뭔가가 쪼개지고 터지는 느낌이 들어요.
이 시를 읽고 나서 우리가 만나는 과일은 대체로 얼마나 매끈하고 예쁜 것들인가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과일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생겨야 한다,’ 그렇게 플라톤이 말하는 사과의 이데아나 복숭아의 이데아 같은 형상을 한 것만 만나고 사는 삶이었구나 싶더군요. 나 자신부터 그렇게 흠 없이 매끄러운 사람이 아닌데 내 입에 넣는 과일은 왜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새삼 이상함을 느껴요. 못난이 농산물을 따로 모아 유통하는 마켓이 있지요.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의 눈에 좀 못생겼을 뿐 맛도 향기도 엄청난 억울한 친구들이 갈 곳을 찾아가는 모습이 어찌나 흐뭇하던지요. 사실 심하게 굽은 가지나 재미있게 생긴 호박을 못난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인간의 기준인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망가지고 터져야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죠. 상품성이라는 단어를 굳이 인간에게 꼭 써야 한다면, 열과가 되어보지 않은 인간은 오히려 상품성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희 동네에는 동전을 내고 직접 꽃을 잘라가는 무인 꽃밭이 있어요. 산책을 하다가 그 곁을 거닐게 되었는데, 저의 말 창고 안에 열과와 파치라는 단어가 들어온 기념으로 꺾인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꽃을 일부러 골라와 봤습니다. 그대로 두면 몇 시간 뒤에 바로 햇빛에 사그라질 친구들을 데려오는 마음이 제법 근사하더라고요. 꽃은 물에 발을 담가준 지 삼십 분만에 바로 생기를 되찾았고, 점점 봉긋해지더니 활짝 피어나 그 안에 든 작은 우주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더럽혀진 바닥에서 또다시
익다가 터져버린 삶. 피부가 터질 만큼 안에 든 물기가 많았던 삶. 틀이나 껍데기가 감당할 수 없었던 내면의 무엇. 상품성이 없다는 무미건조한 말로 재단하기엔 열과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인가요. 우리의 여름은 이렇게 향기를 뿜고 속살을 드러내며 툭툭 터져버리는 계절이면 좋겠습니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고, 그 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절이면 좋겠고요. 그 더럽혀진 바닥까지 사랑하는 건 여름을 지나는 청춘들에게 조금 어렵겠지만, 가을의 익은 눈과 겨울의 서리 낀 눈은 그 찐득한 바닥이 얼마나 황홀하게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곧 보게 되니까요.
시를 읽고 여러 가지 표현들이 마음에 착 붙었는데 그중 하나가 슬픔을 세는 새로운 단위예요. 오늘의 슬픔 한 그루, 그날의 슬픔 세 그루. 슬픔을 ‘그루’로 세는 작은 행위만으로 슬픔은 한결 고와지고 좀 더 견딜만해지는 것 같아요. 슬픔의 단위가 그루라면 세상의 수많은 열과들은 아주 깊고 고운 위로를 받을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연마다 행마다 제 마음에 쏙쏙 들어와 예쁘게 내려앉는 이 시가 참 좋았습니다. 왜 어떤 시는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는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저도 궁금해요. 돌이 되어 가라앉았던 시가, 혹은 시간이, 때로는 폭풍우처럼 다시 휘몰아치는 이유도요.
앞서 여름의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요. 여러분도 나만의 ‘여름의 시인’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훔쳐가도, 망가져도, 더러워져도, 슬퍼도 좋은 그런 여름. 여름이 기다려지는 시가 한 편 있는 걸로 인간의 삶은 살짝 행복해진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시를 품고 8월을 맞으려고 해요. 여러분의 여름도 향기롭고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부디 마음껏 더럽히고 또다시 시작하기를.
제 브런치에 <읽고 씁니다>라는 매거진이 있습니다. 주로 리딩리딩에 연재하던 서평을 올려두었던 매거진이에요. 그때는 글 전체를 올려둘 수가 없어 일부만 올려 두었는데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서 원문 전체를 살려 보려고 합니다.
복원도 일이라, 하나씩 차례로 하려고요. 첫 글 다시 살렸습니다. 제가 브런치에 처음 들어와서 굉장히 즐겨 읽었던 작가님 글이 책으로 나온 걸 보고 리딩리딩의 첫 서평을 썼었죠. 갓 걸음마 시작한 병아리 작가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쓸 공간을 주었던, 이제는 사라진 리딩리딩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https://brunch.co.kr/@jinmin111/118